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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민 Nov 28. 2023

여자보다 강하니까

예쁜 아기를 낳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몸들

...... 한국 사회는 아직 '모성애 신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임신을 하면 어떤 고통이 수반되는지보다 얼마나 더 큰 축복을 갖게 되는지를 더 열심히 말하곤 한다. 그 목소리가 너무 커서 임신의 고통을 전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 박선영, 유지영, 『말하는 몸 1』, 문학동네, 2021, p. 103.  


  잔인한 시절이었다. 남편과 산부인과에서 내 자궁에 자리 잡은 '아기집'(난황)을 확인했지만 밤샘 근무를 피할 수 없었다. 강인한 모체가 아니어서, 애끓는 모성이 부족해서 그 생명을 지키지 못했다. 세 번의 저녁 근무, 그리고 이어진 두 번의 밤 근무 끝에 피를 쏟았다. 마지막 밤 근무가 끝나기 세 시간 전, 모두가 새근새근 잠든 토요일 새벽 다섯 시, 병동 여자 화장실에서. 소리 죽여 울었던가,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켰던가.


  "화학적으로 임신을 확인하고 찾아온 세 분 중 한 분은 유산을 합니다. 제 경험상 그래요."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임신 테스트기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인체 융모 성선자극호르몬(human chorionic gonadotropin, hCG)이 검출되어 산부인과를 찾은 많은 모체들이 유산을 선고받는다고, 예전 같으면 생리가 불규칙한 건 줄 알고 병원을 찾지도 않았을 거라고.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남편과 부둥켜안고 엉엉 운 걸 보면, 그의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절박유산을 하고 절망했던 그날을, 큰 아이가 열네 살이 된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손 써 볼 틈도 없이 깨끗이 비워진 자궁을 확인하고, 실낱같은 희망을 꿈꿔볼 여지조차 없다는 것에 화가 났다. 직장(병원)에서 겨우 얻어낸 휴가 5일 간 남편이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고 몸을 추슬렀고, 3개월 간 피임했다. 충남 보은 깊은 산속, 용하다는 한약방에서 지어온 '아들 낳는' 약을 시부모님께서 하사하셨다. 한두 봉만 먹었지만 그 기운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째 유산은 더 혹독했다. 분명 초음파상 아기집이 성장하고 있다고 했는데, 공식적으로 9주 차인 난황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계류유산의 끝은 소파수술이었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수술대에 누웠다. 남이 누워있는 것만 봤는데, 이번에는 내가 마취제를 맞고 수술대 아래로 빨려 내려갔다. 기억인지 꿈인지 알 수 없지만, 혼절한 사이 긴 쇠막대가 허락도 없이 내 몸 안을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전동 스크루(screw)가 아기집을 무자비하게 터뜨리고 갈아 없앴다. 깨어보니 회복실 침대 위에서 수술가운 한 장만 걸친 채 하혈하며 누워있었다. 어린 시절 죽음의 강에서 놓친 엄마의 손길을 찾으며,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아프게 해서 미안했어요. 아이를 낳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어요."

  "아이 낳는 게 참 고생스럽지. 너를 낳을 때도 힘들었어. 그치만 네가 크는 걸 보면서 그 고통은 다 잊었지."

  나를 배고 낳던 이야기를 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자궁을 헤집는 고통을 그 사람과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사실이 원통하고도 미안했다.


  두 번째 임신 기간이 세 달이나 되었기 때문에 내 몸은 전형적인 임신부로 변해 있었다. 소파수술은 끝났지만 임신을 위해 분비되던 호르몬과, 그로 인해 변한몸이 임신 전으로 회복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를 품에 안지 못했는데 두 번이나 임신을 경험한 내 몸과 마음은 퉁퉁 붓고 헝클어진 상태였다. 우연히 배부른 임신부나 아기 안은 엄마를 볼 때마다 쉽게 눈을 떼지 못했다. 영영 아기를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산후우울을 짧게 경험했던 것 같기도 하다.




  둘째 임신 3개월 즈음, 오른쪽 발등이 아파왔다. 신발에 발등이 닿을 때마다 통증을 느꼈고, 샤워를 하다가 오른쪽 종아리 뒤쪽을 만질 때 따끔거리는 통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놀라서 통증 부위를 관찰해 보니 발등 피부가 붉고 열감도 느껴졌다. 일반외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니 정맥염이라고 했다.


  입덧 때문에 식사량이 현저히 줄었고 변비가 왔다. 양수와 태반, 아기 무게가 합쳐져 골반 아래쪽을 눌렀고, 이래저래 복압이 올라가면서 하지 순환에 문제가 생겼다. 다리 정맥의 혈액 흐름이 느려졌고 혈관 몇 군데에 염증이 발생한 것이다.


  "임신 상태라 약을 지어드릴 수가 없어요. 압박 스타킹을 열심히 신어보고 좋아지길 바래봐야죠. 정맥염이 심해진다면 수술을 고려해야 하는데, 임신 중에 어떻게 수술을 하겠어요?"


  임신 중에는 아프면 안 된다. 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는 딜레마를 경험하고 싶지 않다면. 하긴, 질병은 희망하지 않아도 찾아오니 피할 방도는 없다. 그러니 기도했다, 임신 중에는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스타킹 열심히 신을 테니 악화되지 않게 해 주세요, 라고.




 우여곡절 끝에 노오란 하늘을 구경한 후 둘째를 낳았다. 모유수유가 그렇게 좋다기에, 우직하게 17개월이나 젖을 먹였다. 아기 얼굴만 떠올려도, 시도 때도 없이 젖이 줄줄 흘렀다. 내가 젖소 같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수업 끝나고 교수님과 저녁식사를 할 때에도,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고 보송한 옷을 입어보려는 찰나에도, 젖을 뿜었다.


  자애로운 성모를 꿈꿨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젖을 물리면 물 한 모금이 간절했고 허기가 몰려왔다. 먹이기 위해 뭐라도 먹어야 했는데, 온몸에 찐득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몸이 무겁고 졸리고 피곤해서 내 먹거리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영양이 부족한 젖을 주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아기가 변을 묽게 보면 "네 젖이 묽어서 애가 설사를 한다.*"고 타박을 들어야 했다. 틀린 말인 줄 알면서도 당당하지 못했고 그래서 억울했다.

*모유 먹는 아기가 일시적으로 변을 묽게 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르는, 어떤 분의 말씀이었습니다.


  바깥 활동을 하는 동안 유축을 하지 못하면 젖이 불어 등까지 아파왔다. 일회용 패드는 새어 나온 젖을 감당하지 못했다. 몸에서 젖내가 났고 무척 신경 쓰였지만, 아이에게 모유를 주는 것이 인생일대의 과제가 된 가여운 여자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하필 그때 또, 아팠다. 비염이 왔는데 병원에 가지 않았다. 어차피 약을 제대로 지어주지도 않을 텐데 무슨 소용이겠나 싶었다. 모유수유를 잠시 쉬면 그만이었는데, 약을 먹는 며칠 동안, 미리 유축해 얼려둔 젖을 먹였으면 되었는데, 맹목적으로 모유 먹일 생각만 했다.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어머니가 되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산후우울로 잠시 인지력과 판단력이 떨어졌던 것인지. 모유수유 교단(敎團)에 잠시 끌려가 세뇌를 당하고 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며칠 후 머리가 아파왔다. 머리를 숙일 때마다 이마 안쪽이 찌릿거리는 통증. 부비동염(축농증)의 증상이었다. 알면서도 며칠을 더 버텼다. 반쯤 미쳤던 게 틀림없다. 결국 모유수유를 중단하고 항생제가 포함된 약을 먹고 겨우 나았다. 그 후로 몇 년간, 감기가 왔다 하면 부비동염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죽일 놈의 모유수유"를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 사회는 임신한 여성의 몸에는 관심이 없어요. 임신부들도 자조하면서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임신부들은 열외라고, 현대의학에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사회는 모성으로 극복하라고 이야기해요. 이게 극복해야 할 문제는 아니에요. 임신부가 조금만 고통스러운 티를 내면 모성이 없다고 말해요. 여성의 몸은 아기를 낳기 위한 모체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 박선영, 유지영, 『말하는 몸 1』, 문학동네, 2021, p. 108.


*사진 : Unsplash (Jan Ca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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