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아이들은 주말마다 게임을 한다. 큰 아이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하는 배틀그라운드를, 작은 아이는 태블릿 PC로 하는 포트나이트를. 게임을 하면 공부할 시간을 빼앗긴다, 게임 알고리즘 안에만 갇혀 생각하게 되어 창의성을 펼칠 시간이 줄어든다고 하니 걱정도 된다. 그러나 게임하는 아이들은 지켜보면 가상 세계에서 허구의 캐릭터가 되어 자신의 선택을 시험해 보고, 게임을 마친 후에는 게임 스토리를 스스로 구상해 보기도 한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튜브로 이런저런 잡학을 쌓는다. 궁금한 게 있으면 영상을 찾아본다. 장난감, 애완동물 등 자신들이 만들 수 있는 콘텐츠를 구상해서 영상을 제작해 업로드하고 '구독'과 '좋아요'의 희로애락을 경험한다. 미디어 중독을 경고하는 전문가들도 많지만 우리 아이들은 미디어와 함께 살고 있다. 미디어를 다루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숙명일 것이다.
기성세대인 나의 잣대로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기는 어렵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고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중요해지기도 한다. 음악 감상을 즐기는 이들에게 필수품이었던 'MP3 플레이어'는 스마트폰에 밀려 저가형 혹은 고급형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없어지거나 수요가 줄어들게 될 직업도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앞으로 세상이 어찌 변해가든, 우리는 각자가 타고났거나 개발하고 있는 소질을 붙잡고 끈덕지게 살아가야 한다.
어제, 일로 만난 네 사람이 우연히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서로의 인생을 잘 모르는 직장여성들이 부대찌개를 앞에 두고 공감했던 화두는 '진로'. 이제 신혼인 30대 초반 A는 서너 번 이직 후 10개월 남짓 다니고 있는 이번 직장을 계속 다닐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상사 앞이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딸을 둔 40대 후반의 B가, 중학생 아들을 키운다는 40대 초반의 C에게 "선행을 꼭 시켜요. 아니면 고등학교 때 고생해요."라는 조언을 건넸다. 자연스럽게 아이 학업, 대한민국 입시로 대화가 흘러갔다. 얼마 전 큰 아들을 장가보냈다는 50대 후반의 D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C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애를 어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로를 미리 찾아야 문과, 이과도 미리 선택하고 학생부도 잘 만들 수 있고, 그래야 대학도 잘 갈 수 있더라구요."
B가 한숨을 내쉬며 맞받았다.
"사실, 저는 제 진로도 잘 모르겠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애들이 자기 진로를 명확히 알 수 있나요?"
D가 말했다.
"진로는 항상 고민이지. 나도 어찌하다 보니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첨부터 진로를 알고 있던 건 아니니까."
열띤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생각이 많아진 만큼 젓가락만 바삐 움직였다.
제임스 마샤라는 심리학자는 부모, 교사 등 타인이 제시한 진로를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 방향으로 열심히 나아가는 상태에 '정체성 유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삶. 놀랍게도 슬프지만 정확한 표현이었다, 내 지난날을 설명하기에.
뭐든 열심히 하고, 적당히 잘해 내는 아이들이 경쟁적인 입시 환경에 놓여있다고 해 보자. 이제 막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천천히 자신을 알아가야 할 시기에, 진로를 빨리 결정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경쟁에서 밀리게 된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고, 세상이 변화해도 중심을 잃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 있을지, 생각할 시간이 없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충분히 시행착오를 겪을 여유 따윈 허락되지 않는다.
열심히 '국영수사과' 공부를 하고 성적에 맞추어 우연히 어느 학과에 진학했고, 운 좋게 자기 성향에 맞는 일을 하게 된다면 해피엔딩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에 그 '유예된 방황'은 중년을 앞둔 어느 날 '사십춘기'로 발현된다, 내 경우처럼.
전공을 결정하고 대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고 직업을 선택할 때, 나는 내 인생의 방향과 상관없이, 매일 차곡차곡 쌓아온 성실함이 가져다준 결실에 취해 있었다. 열심히 달려왔고 성과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순간을 맞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 '정체성 유실'에서 답을 찾았다.
사십춘기 초입에 답을 찾았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이제 해결방안만 찾으면 된다. 종이를 만지고 이야기 속에서 감동을 느끼고 사각사각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했으므로, 이렇게 글을 쓰며 한 걸음씩 나아간다. 내 주변 '언니들'은 말한다. 마흔은 아직 젊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내 아이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생각 또한 일종의 강요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마음과 욕구가 어디로 흐르는지 스스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경험이 아이들에게 '타산지석'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이들은 이제라도 엄마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다행이라고 나를 응원해 준다. 나도 그들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