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아플 때
간호사 엄마라고 별 수 없더이다
지금은 밤 12시 반. 오늘 오전에 정강이에서 0.6cm 크기의 혹을 떼어낸 열세 살 아들이 병실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다. 두해 전쯤 정강이에 검붉게 부어오른 작은 혹을 보고, 아이에게 어디에 부딪혔냐고 물었다. 아이는 부딪힌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분명 다쳐서 부풀어 오른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사라질 거라고 확신했다.
그 후로 아이가 혼자 샤워하게 되고 옷 갈아입을 때 프라이버시를 필요로 하게 되어, 자연스레 아이의 몸을 살필 기회가 없었다. 정강이의 혹도 그렇게 기억에서 흐려졌다. 강원도, 대전으로 발령받아 근 2년을 기러기 생활하게 되어,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날도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일을 정리하고 아이들 곁에 돌아왔다. 하루는 잠자리에 누운 아이의 다리를 주물러 줬다. 사춘기가 되어 털이 나고 두꺼워진 아이의 피부 아래에서 뜻밖에, 그 혹이 만져졌다. 이 혹이 계속 있었냐, 아프지는 않았냐, 커진 것 같더냐 등 아이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통증은 없지만 신경이 쓰여서 병원에 가고 싶다, 그게 아이의 대답이었다.
불필요한 검사는 하지 않고 나름 정직하게 진료한다고 생각하는 ㅅ정형외과 의원을 찾았다. X선 촬영, 초음파 검사 결과 작은 혹이 있는데 석회화(calcification)가 의심되니 확진을 위해 MRI를 해 보는 게 좋겠단다. 석회화라니, 좋아하지 않는 용어를 들으니 찜찜했지만, 별 거 아니야, 아이 앞에서 내색 안 하려고 노력했다.
MRI를 위해 방문을 권유받은 병원은 과잉진료의 추억이 있어 방문을 꺼리던 ㅂ병원이었다.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의뢰서를 가져가면 바로 검사해 줄 거라는 얘기에, 검사나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방문했다. 일사천리로 검사, 판독, 의사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그날 입원해서 다음 날 수술받을 수도 있단다. 그러나 종합병원도 아닌 곳에서 '전신마취'로 수술을 한다는 대목에서 내 마음속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물론 마취과 의사가 상주할 테고 수술, 입원 시스템도 잘 갖춰진 병원일 거다. 또다시 그러나, 중학생 아이가 정강이에서 작은 혹을 떼어내기 위해 전신마취 수술을 받는다는 것도, 혈관종인 것 같다는 진단도 왠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나는 의사들이 보기에 아무것도 모르면서 의심만 많은 엄마인 걸 인정하기로 했다.
집 주변의 종합병원 두 곳에 전화를 걸어, 아이의 검사소견을 이야기하고 알맞은 의사 선생님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콜센터 직원이 해당 과에 문의하고 경력이 많은 분을 추천해 주었다. 그 의사의 프로필을 찾아봤고 둘 다 마음에 들어 예약을 했다. 최근에 연구논문을 발표했다는 신문기사도 검색되어 나왔고, 진료스케줄을 확인하니 진료도 열심히 보며 왕성히 활동하는 분들인 것 같았다.
ㅂ병원에서 진료 마치고 나올 때 MRI 복사 CD와 판독지 사본을 받아왔다. 직업병인지, 과잉 치밀함인지 두 곳 이상 일치되는 의견이라는 확인이 필요했다. 더 큰 질문은, 아이가 수술 도중 다리를 움직이며 난리법석을 할 정도로 어린아이가 아닌데, 전신마취가 정말로 필요한가, 였다.
종합병원 정형외과 의사는 벌써 다 읽은 MRI 판독지를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한참 앞뒤로 넘겨보다가, 굳이 여기서 수술할 필요가 없는 것 같으니 성형외과로 가 보라고 했다. 이게 병원 내부의 룰인지, 의사 개인의 판단인지, 임상진료지침에 따르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생각보다 심각한 게 아니라는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성형외과로 향했다.
다리에 흉 하나 없이 봉합해 줄 것 같은 성형외과에 오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지난주에 ㅂ병원에 입원하여 전신마취로 수술할 뻔했던 경우를 떠나보내며 마음속으로 싱긋 웃었다. 게다가 국소마취 주사의 따끔함을 견딜 수 있다면 아이에게 부담듸는 전신마취가 필요 없다니, 마음속에서 여기서 수술받읍시다, 땅땅땅! 결정이 났다.
합리적, 이성적으로 치밀하게 결정할 줄 알았으나, 감정적으로 치우친 결정을 내린 건가. 잘 모르겠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돈을 더 내고서라도 큰 병원에서, 내가 믿고 싶은 의사를 선택한 것이라고 해 두자.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미안함을 덜고자 난생처음으로 1인실을 선택했다. 애들 어릴 적 폐렴으로 여러 차례 입원했는데, 아이와 한 침대에 끼어 자며 옆자리 아이의 밤샘 통곡과 엄마들의 걸쭉한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쳐 입이 다 헐었어도 6인실을 고집했었다.
아들아, 1인실에서 푹 쉬고 얼른 나으렴. 덕분에 엄마도 발목 아래를 간이침대 밖에 내놓고 잠들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제는 네가 불편한 곳이 있는지 곁에서 살피고 챙길게. 조직검사 결과 모낭종일지, 혈관종일지, 누구의 가설이 맞든 간에, 그저 별 것 아닌 '물혹'이기를 기도하며, 엄마도 이제 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