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 트라우마

내가 추위에 질겁하게 된 서사

by 지영민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진단명은 추위 트라우마.


진단 조건: 심각한 사건(추위)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소비함.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도인지는 추가 평가 필요.


첫 번째 삽화: 상기 환자 중, 고등학교 시절 교복 스커트를 매년 겨울에 착용하면서 이가 부딪힐 정도로 떨며 학교생활을 했다고 함. 특히 운동장 조회에서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듯한 추위를 느꼈음.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학교에 늦게 갔다고 함. 기모 스타킹 착용, 교칙에 어긋난 체육복 바지 덧 착용 등으로 증상을 경감시키려 노력. '라떼는' 치마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울먹거림.


두 번째 삽화: 수능 고사장 앞 '명당' 자리에서 선배들을 응원하기 위해 남의 학교 정문 앞에서 밤을 샘. 양 호주머니, 등, 배 부위에 핫팩을 넣고, 빈 식용유통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계속 몸을 움직여 체온을 유지하려 노력하였음. 그러나 새벽 2~3시경부터 심각한 한기, 오한, 급격한 피로를 느껴 새벽 4시부터 노래방에서 몸을 녹였으나 증세 호전 없었음. 가까스로 응원 마치고 집에서 휴식하였으나 2일 간 원인 없는 한기를 느꼈다고 함.


세 번째 삽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으로 겨울 극기 훈련을 하면서 추위에 반응하는 시간이 점차 짧아졌고, 2~3월 야외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며 추위가 예상되는 상황을 인지하면 마치 추위에 실제 노출된 것처럼 한기를 느꼈다고 함. 특히 그 아르바이트는 허허벌판에서 스커트, 스타킹 바람에 외투는 안 입은 채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서 있는 것이었다고 함.


네 번째 삽화: 신혼 시절 외풍이 센 시댁에서 자다가 동사하는 위협을 느끼고 남편에게 심하게 짜증을 내며 깸. 아마 첫 부부싸움인 것으로 기억함. 그 이후로 시댁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건 일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추위 때문인 것 같다고 함(그런데 여름엔 왜).


이상의 삽화들로 볼 때 상기 환자는 추위 트라우마로 진단 가능하였음.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 평가는 다음과 같음.


환자 본인: 기온 앞자리가 1만 되어도 월동 준비로 옷장을 뒤집고 방마다 온수 매트를 깔며 체력을 소진함. 10월부터 장갑, 모자, 에코 퍼 목도리를 꾸준히 사 들이고, 옷장이 터져 나가도 해마다 스웨터, 패딩점퍼를 주문함. 오늘도 칼바람에 얼굴 틀까 봐 페이셜 오일을 주문하였음(여보, 미안해). 11월부터 실내온도가 26도 아래로 내려갈까 노심초사하며 보일러를 틀어대 가산을 탕진함.


환자 가족: 남편은 통장 잔고를 보며 노후를 위협받는 악몽에 시달림. 목이 답답한 걸 싫어하는 둘째에게 아침마다 터틀넥, 목도리를 강요하며 실랑이하여 아이가 학교에 지각하는 위기에 자주 처함. 보온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힙중딩'다운 멋과 핏(fit)을 망치는 엄마의 후진 없는 코디 제안으로 큰 아들이 스트레스와 짜증을 자주 호소함.


제안 가능한 치료:

1. 집콕 - 물리적 두문불출, 일명 "집 밖은 위험행!"

원천적으로 추위를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 운동, 장보기, 도서관 방문, 모임 참석, 아이 학원 픽업 등 정상적 생활을 위해 이 방법을 완전히 적용하기는 어려움.

2. 인지훈련 - 구비된 월동 용품 리스트를 작성하여 쇼핑이 아주 충분함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함. 월동품 구입 전 쇼핑이 필요한 이유를 3가지 이상 제시해 보도록 함(카드 압수와 병행 시 더욱 효과적). 갱년기는 사춘기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아이들과 타협하는 전략을 개발하도록 함. 추위가 온다고 그렇게 큰일이 나지 않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겨울을 잘 보낼 수 있음을 인식하게 함.

3. 응급처치 - 따뜻한 음식 섭취(붕어빵, 국화빵, 호떡, 호두과자, 호빵과 코코아, 편의점 라면, 핫바, 어묵 국물, 츄릅!), 따뜻한 실내로 대피(카페에 괜히 간 거 아님)




추위가 정말 싫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에너지와 돈을 절약하되 기부도 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따뜻한 겨울이 되기를. 이 추위에 홀로 떨고 있는 이웃이 없기를.


*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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