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익 33호] 픽션과 현실, 그 사이의 얄팍함 - 권휘
삶은 설명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 공너싫
‘픽션과 현실, 그 사이의 얄팍함’의 저자는 언젠가부터 삶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그 위화감은 픽션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현실이 점점 더 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온다고 언급했다. 정말 픽션과 현실은 경계가 사라지고, 현실은 점점 더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일까? 이 글에서 다루는 현실은 인간관계, 사랑, 운과 같은 본인의 선택에 의한 결과들과 얽히는 삶에 대해서이다. 과학의 발전에 의한 변화는 제외한다.
삶은 우리의 생각만큼 개연성 있게 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많은 사건들은 원인과 결과가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삶은 불연속적인 사건들의 나열이며 결코 연속적인 하나의 곡선이 아니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이 친구랑은 왜 친해지게 되었을까? 우리는 나름대로 각각의 이유를 붙여 보지만 정확히 설명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삶은 설명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근래에 그렇게 된 것도, 과거의 특정 어느 순간부터 그래 왔던 것도 아니다. 삶은 원래 그런 것이다. 삶은 개연성 없는 사건들의 나열이기 때문에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개연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거짓말을 판별할 때 사건들이 매끄럽게 연결된다면 더욱 의심해봐야 한다. 매끄러운 사건들의 연속은 오히려 픽션이라고 볼 수 있다. 픽션은 임의로 사건들에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지 않고 개연성 없이 사건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선 자신이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모르는 순간들도 반드시 존재한다.
물론 개연성이 있는 일들도 일어난다. 그러나 모든 일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연성 있는 일들보다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개연성 없는 일들은 우연이라고도 불린다. 연결되는 실마리가 별로 없는 일에 개연성을 끼워 맞추는 경우도 많다.
누구의 기억이 옳은가를 두고 다툰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곧 기억을 가지고 다투는 것은 의미 없는 행위임을 깨닫는다. 누구의 기억이 정답인지 확인할 수도 없을뿐더러 제삼자에게 물어봐도 예상치 못한 다른 답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항상 왜곡시킨다. 그 이유는 뇌과학 전문가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기억의 인출 과정에서 저장 과정과 다른 시냅스들이 결합되면 기억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혹은 저장 과정에서 관여했던 시냅스들 중 일부가 누락되면 기억이 변형되거나 소실될 수밖에 없다.” (처음 만나는 뇌과학 이야기 p.29).
우리는 삶의 불연속성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개연성 없는 사건들의 나열은 우리에게 모순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것을 불편해한다. 자신의 기억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을 비정상이라고 느낀다. 구멍을 채워 넣어 기억들을 하나로 매끄럽게 연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들을 조금씩 왜곡한다. 무의식 중에 불편한 모순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기억들을 왜곡해 임의로 개연성을 만들어 버린다. 나비효과도 인간이 불연속적인 일들을 연속적으로 만들기 위해 찾아낸 개연성이다. 조금이라도 연결의 실마리가 있는 사건들을 전부 엮어 결국엔 큰 결과도 작은 일에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적인 곡선이길 바란다. 그래야 모든 일이 설명되고 위화감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위화감도 설명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느끼는 모순일 것이다. 과거의 모순들은 이미 왜곡시켜져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이 진짜라고 믿는다. 그러나 최근의 일들은 아직 왜곡시키지 않아 연결되지 못한 것들이 있다. 생각이 더 깊어지면서 막연히 왜곡하지 않고 사건들의 불연속성에 의문을 품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은 왜곡 작업을 더디게 일어나게 하며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일림 시인은 현실과 픽션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다고 언급했다. 문학작품이 잘 팔리지 않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요즘 사람들은 힘든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현실을 버티기 위해 생각과 신경을 현실에 모두 사용한다. 쉬는 시간이 생겨도 의문이나 생각거리를 주는 문학작품을 잘 찾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자기 계발서나 자격증 문제집을 읽는다. 아니면 다시 현실에 돌아갈 때를 대비해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보충한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읽을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저자는 언제인가부터 위화감을 느껴왔고 이는 세상의 변화라고 언급했다. 여기에는 저자도 점점 나이 들어간다는 데서 오는 요인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세상은 변화 없이 일정하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각이 깊고 성숙해진다. 생각이 더욱 깊어져 개연성 없는 일을 그냥 보내지 않고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 회상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볼 때 인지하기 시작한 왜곡들에서 오는 위화감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확실히 예전 시대의 사람들보다 요즘 세상의 사람들이 더 많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예전엔 생각의 필요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모님 세대만 봐도 생각을 하는 몇몇은 좋은 환경을 누렸을 수 있었겠지만, 굳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요즘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든 사회이다. 살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의문을 더 많이 품는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생각의 깊이가 더 깊어졌고 모순을 더 잘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최순실 사건을 언급하며 현실이 픽션보다 점점 더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최순실 사건은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 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다. 그런 스케일의 사건이 세상에서 처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기록들만 읽어봐도 기상천외한 사건들은 많았다. 기록이 남지 않은 것뿐이지 훨씬 더 이전에도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순실 사건은 현재 사회가 점점 더 극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픽션과 현실은 단지 상상해서 쓴 것인지,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의 차이만을 가지고 있다. 픽션에서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을 수 있고 우연을 가장해 억지스럽게 일들이 연결되어있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우연이 많이 일어날 수도 있고 몇몇 사건들에서는 개연성을 찾아볼 수도 있다. 즉, 픽션과 현실은 누가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대등한 것이다.
원래 세상은 예측할 수도 없고 계획한 대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해서도, 잘해서도 아니다. 세상은 원래 무작위의 세계이다. 세상은 이제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본인의 선택이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의 무작위성에 상처를 받거나 괴로워하게 될 수도 있다. 자신이 잘못해서 일을 그르게 했다는 생각에 힘들어할 수도 있다. 세상의 무작위성을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뜻대로, 예측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인정하며 살게 된다. 그 안에서 억울해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살아간다면 불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09.28. 공너싫.
은익 33호는 한국 항공대학교의 교지편집위원회 ‘은익’의 잡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