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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일간 Aug 02. 2024

우리는 발버둥 치느라 서로의 조언이 잔소리로 들리나 봐

짧은 생각의 기록

딸아이가 말을 참 안 듣는다. 답답하다. 가르쳐달라고 했으면서 하나도 말을 안 듣는다. 


힘들게 오른팔을 물 위로 크게 올린다. 숨이 모자란 지 자유형과 배영 사이 어딘가에서 반쯤 누워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손가락은 붙이고 손바닥은 펴라고. 물살을 가르듯 손을 앞으로 밀라고.' 물속애서 들리는지 알 수 없지만 레인 옆을 걸으며 계속 얘기한다. 


여기 레인 옆 미끄럼 방지판이 너무 아프다. 좀 더 빨리 걸어가면 덜 아플 것 같은데, 느린 박자에 맞춰 엉금엉금 사뿐사뿐 지압판을 걸어간다. 이렇게 걸으나 저렇게 걸으나 아픈 건 똑같을 것 같다. 잔소리도 내 고통도 상관없는 아이는 수영이 즐거운가 보다. 웃고 있는 게 보이고 물도 분명 먹고 있다. 


“물속에서 제발 웃지 좀 말라고!” 


내 잔소리들이 들렸나 보다. 보글보글하더니 웃는 모습 그대로 고개를 내민다. 입에 물이 한가득이다. 켁켁 거리며 물을 뱉으러 가장자리로 온다. 제발 웃기지 좀 말라고 핀잔을 준다. 나도 지지 않고 웃긴다고 물속에서 입 벌리고 웃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잔소리를 더한다. 수영 가지고도 할 잔소리가 한가득인데, 내가 지금 무슨 잔소리까지 하고 있나 싶다. 


천장을 보며 심호흡을 한다. 아이를 보니 이빨을 꼭 물며 안 웃는 척을 한다. 단호한 표정과 달리 입은 크게 벌어져 송곳니까지 다 보인다. 피식 웃어버렸다. 잔소리를 너무 많이 했나 싶어, 조금 차분하게 ‘이빨 사이로 물 다 들어가거든요.’라고 하자 ‘알았어 알았어’ 하고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야기하고 나니 다시 발이 아파온다. 


그리고 아이는 똑같은 잔소리를 다시 듣기 딱 좋게 똑같은 모양으로 수영을 하고 있다.  




나도 입을 다물고 나아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문득 나도 저렇게 수영할 때가 있었나 생각해 본다. 


‘내가 너무 힘들 때 하는 수영 자세랑 별 차이가 없네.’


제대로 수영을 선생님에게 배워본 적도 없는 아이다. 학교에서 몇 번 수업을 들었다고는 하나, 물장구치며 놀고 온 게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제대로 배웠으면 좀 늘었을 테인데, 별 차이가 안 보인다. 수업 말고는 여행할 때나 가끔씩 내가 알려준 게 전부다. 코로나로 그런 기회마저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25m 레인을 엉망이든 어떻든 간에 이겨내고 끝까지 가보겠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미안해졌다. 


왜 자꾸 잊어버릴까? 

지금까지 이만큼이라도 하기 위해 해온 것들은 왜 그리도 쉽게 잊어버릴까? 힘든데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은 왜 눈에 안 들어오는 걸까? 더 잘하라고 하는 말이다 또는 다 널 위한 말이라는 식상한 변명들을 이유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엄마 아빠란 그런 사람일까?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는 한도 안에서 조언이자 잔소리를 최대한 전하고 싶은 사람. 고생한 거, 노력하는 거, 잘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만 그 칭찬을 할 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어 더 나아갔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아이가 저렇게 속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도 한걸음 한걸음 옆에서 고통스럽게 따라가고 있는 신세인 그런 사람. 그리고 그렇게 잔소리하다가도 아이의 웃음에 잠시나마 그 고통을 잊는 그런 사람.


나는 듬뿍 받은 사랑과는 달리 격려와 칭찬은 거의 받지 못했다. 그래서 반대로 칭찬과 격려를 하며 아이를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내가 아이와 함께할 시간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거, 아이는 생각보다 빠르게 자라고 있다는 거, 마지막으로 작년에 겪었던 것처럼 갑자기 그 시간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거, 이런 초조함이 수영장 저 바닥부터 짙은 잉크를 탄 것처럼 가끔씩 올라온다. 


지금 아이는 발버둥을 치고 있다. 그냥 가라앉지 않으려고 그리고 멈추지 않으려고 하는 몸짓이다. 다시 보니 수영이라 하기도 그렇다. 저 와중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들리겠는가. 지금 아무리 얘기한 다고 해도 듣기 힘들 거다. 발버둥 끝에 잠시라도 여유가 생겼을 때, 그때는 내가 말했던 게 잔소리가 아니고 혹시라도 조언이 되지 않을까? 


자전거 타고 다니던 상하이 밤


잠깐 수영장 밖을 보니 상하이의 가로수 가득한 도로가 보인다. 돈 아끼려 아침저녁 30분씩 자전거를 탔었다. 그 길을 다니며 매일 여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와이프의 그 고마운 조언들이 잔소리로 들렸던 건 나도 이곳에서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끝나자 다시 발바닥이 아파왔다.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아픈 수영장 바닥은 본 적이 없는데, 여기라면 아무도 뛰다가 넘어지지 않을 것 같다. 딴생각으로 아픔을 잊어보려 했지만 더는 안 되겠다는 순간 아이가 활짝 웃으며 소리친다. 




“아빠! 나 끝까지 처음으로 왔어!”


공감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것도 모른 것 같아 마음이 찔렸다. 그리고 아이가 하는 말에 한번 더 마음이 찔린다. 


“아빠! 그런데, 숨을 이렇게 쉬는 게 맞아?”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었는데도, 그렇게 발버둥 치면서도 내 말을 조금이라도 듣겠다고 하고 있다. 너무 이쁘다. 


“너무 잘했어. 정말 생각도 못했는데, 대단해. 고생했어. 차근차근해보면서 조금 덜 힘들 때 아빠가 했던 말들도 생각해 봐.” 


“응!”


“그래도 물속에서는 좀 제발 웃지 말라고!”


활짝 웃는 아이와 이 순간을 머릿속에 남기려 최대한 오래 눈을 뜨고 바라봐본다.




나중에 보게 된 이 글의 초안에 아이가 잔망스러운 말투로 덧붙여둔 글이다. 맞춤법 잔소리는 참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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