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어쩌다 한라산 다녀온 일기 (2)
또 만났네, 또 만났어. 산을 오르다보면 엎치락 뒤치락 만나게 되는 다른 그룹들이 있다. 다른 산과 비교해서 한라산은 유독 혼자인 등반객이 드문 편인데, 산길이 워낙 길다보니 먼저 보내드리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가 앞질러가기도 한다.
비슷한 시간 등반을 시작한 4050 베테랑 산악회모임은 우리가 지나가려고 하면 뒤에서 대장이 “좌로 밀착~ 좌로 밀착~”이라고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한 힘있는 목소리로 길을 터 주었다. 일렬종대로 움직이는 그 모습이 짜임새 있어보이고 멋졌다. 산 중턱에서 만난 다른 모녀일행은 자주 쉬긴 했지만 두분 다 미소를 잃지 않고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 훈훈하게 산을 타고 있어 인상깊었다. 비슷한 시기 서로에게 말도 걸지 않고 개인플레이로 올라가기 바빴던 중년부부는 유난히 구름자락이 멋드러지게 펼쳐졌던 쉼터에서 어색한 어깨동무를 하고 우리에게 커플사진을 요청하시기도 했다. 배를 한껏 내밀고 브이를 하시는 모습이 꼭 집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차, 이쯤 와서야 부모님께 한라산을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몰아쉬는 숨이 가빠질 즈음 우리 크루는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눠지게 되었다. 신혼부부인 J와 L이 후발대를 책임졌다. 나중에 듣고보니 L은 길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신기한 나무모양과 경치가 좋아서 남편에게 여기서도 저기서도 인생샷을 찍어달라는 무한 퀘스트를 던졌다고 한다. 우리는 산을 즐기면서 올랐어, 라고 말하는 새신랑의 포장능력에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경의를 표했다. 선발대도 다른의미로 충분히 즐기면서 올라갔다. 나는 선발대의 끄트머리에서 골똘히 나의 버킷리스트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한 가지는 분명히 정해졌다. 운동 꾸준히 해서 근육량 늘려야지. 나의 물렁해빠진 상하체와 연약한 관절들이 갑작스러운 운동으로 욱신거림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잔병치레 잘 없는 건강체질이긴 하지만 내 몸에 주어진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운동과 몸쓰는 것에는 젬병이고 다리가 제구실을 유독 못해서 넘어지고 구르고 미끄러지고 하는 건 다반사다. 그래서인지 10분 전까지만 해도 발등이 미친듯이 아팠는데 그 다음으로는 고관절이 쑤신다. 정말 신기하게도 구간에 따라 다른 부위가 번갈아 아파서 이전의 고통을 없애주었다. “언니 그거 알아? 우리 지금 산 오른지 1시간 반이야. 절반도 못오른거.” 숨이 찬 C가 공기반 소리반으로 무서운 소식을 건네니 이번엔 오금이 저려왔다. 어쩌면 아까의 그 10분 전은 10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끝없는 돌과 나무, 그리고 흐르지 않는 시간. 어쩌면 우리 다른 차원의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닐까.
부-웅-, 그 때 차원을 넘어 온 것만 같은 범상치않은 소리가 들렸다. 드론 띄운 것 같은 소리를 내며 Y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간지에 죽고사는 이 친구는 이번 등산에도 특이한 패션아이템을 준비해왔다. 바로 미니 선풍기가 내장된 점퍼인데, 찬바람으로 상체가 빵빵해져가지고 글자 그대로 쿨하게 떠나는 뒷모습은 세상 누구보다 부러웠다. Y의 스웨그에 질투 어린 핀잔을 주는 S와 C도 다시보니 쿨토시와 수건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역시 등산은 장비빨이라고 했던가. 전날 이마트에서 장볼 때 냉감토시를 사지 않은 것이 이토록 후회될줄이야. 아까 현무암을 헛디디듯 밟은 이후로 오른발 엄지가 얼얼했다. 발톱이 깨진건 아니겠지. 내게 장비라고 할 만한 것은 단지 끈 색이 예쁘다는 이유로 간택된 네이버 최저가 등산화와 전날 급히 구매한 등산양말이 전부다.
대신 나의 강점은 따로 있었다. 장비 못지 않게 중요한 간식을 야무지게 챙겨왔기 때문인데, 가장 인기있었던 간식은 단백질바와 말린살구였다. 한 입에 넣기 좋은 미니사이즈 초코바와 방울토마토도 꿀맛같은 회복약이었다. 우리에게는 정상에서 먹을 김밥도 푸짐하게 준비되어있다. 하지만 번거로울 것 같아 두고 온 컵라면이 마음에 걸렸다. 암만 생각해도 백록담을 보면서 먹는 컵라면 블루리본 백개는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컵라면을 떠올릴 즈음에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졌다. Y는 자켓에 내장된 미니선풍기를 끄고 옷차림을 여몄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도 훅 떨어졌기 때문이다. 분명 슬렁슬렁 올라가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다리 근육과 함께 뇌도 뭉친모양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슬슬 힘에 부쳐 가끔 보이는 몇키로 지점이라는 팻말을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11시 방향 시야에 아득하게 구름낀 한라산 정상이 걸리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산이든 이 때가 가장 힘들다. 눈에는 산 정상이 보이고 나는 계속해서 걷고 있는데 둘 사이는 전혀 가까워지지 않는 마의 구간. 하지만 가야한다. 언젠간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세상 난관이 산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인생 목표 또한 눈에 뚜렷하게 보이고 길따라 걷기만 하면 좋으련만. 아픈 오른엄지를 꼼지락해봤다. 찌릿하기까지 한데 설마 발톱이 깨진건 아니겠지. 새로 산 등산양말이 피로 젖어있는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비도오고 바람때문에 추운데 진짜 조금만 참으면 정상이니까 다들 힘내자” 상투적이지만 힘이 되는 J대장의 응원이었다. 어느새 후발대와 선발대 모두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화려한 전우애가 우리를 감싸네. 외부에 적을 두면 내부집단이 뭉치게 된다고, 리그 최고의 팀을 이끌던 마이클 조던이 그렇게 행동했고 퍼거슨 경이 입증한 리더십이다. “근데 오빠... 정상가면 끝 아니잖아요. 절반 온 거잖아요.” 만사긍정 예스걸인 C가 오늘따라 뼈때리는 직언을 많이한다. 그녀의 말마따나 루트의 중간 지점인 정상에 다다랐다. 네시간 남짓 걸린다던 오르막을 우리는 3시간 40분 정도로 단축할 수 있었다.
3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