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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포도 Apr 15. 2022

등산크루 르네산술:한라산편

어쩌다 한라산 다녀온 일기 (1)

‘한라산 국립공원 성판악 입구 등반로 시작지점’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전날 공항에서 마스크 쓴 돌하르방 사진을 찍었을 때도, 노을지는 제주바다 서쪽하늘을 배경으로 티타임을 가질 때도, 새벽 4시에 일어나 꾸역꾸역 옷을 갈아입을 때도, 어쩐지 비장한 전운이 감도는 카니발 렌트키에서 애써 분위기를 올리고자 싹쓰리노래 받고 구깡 신깡을 듣고있을 때만 해도 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날의 대업은 수능날 교복을 입고 알아서 수험장을 찾아가는 고3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누가 등떠밀고 시킨건 아니지만, 가야만했다.


“자자, 다들 상태 멀쩡할 때 얼른 사진 한방 찍고 출발하자.”

일행의 게으름으로 계획보다 약간 늦어진 출발시간에 예민해진 상남자 아니고 산남자 J는 이 일을 벌인 장본인이다. 재작년 우리가 처음 뭉친 첫 산행에서 등산이 취미인 사람은 J가 유일했다. 그 다음으로 취미칸에 등산을 적기 시작한 C는 2년 전 어느 명절 할 일이 없이 심심하던 차에 같은과 선배 J의 제안에 흔쾌히 OK한 초기멤버다. 호기심 많은 만사 예스걸. 그녀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상대방에게서 예스를 이끌어내는 능력도 수준급이라는 것이다. 운동과 담쌓은 내가 이 일당에 합류하게 된 것도 C의 제안인 걸 보면 그렇다.


“와 대박. 새소리 왜이렇게 좋죠?”

흡사 서울역 환승구간 효과음을 그대로 재생한 것 같은 새 지저귀는 소리에 Y가 신나서 제 기력을 찾았다. C가 가장 만만한 선배인 나를 끌어들인 그 날, J도 마찬가지로 제일 만만한 밴드부 후배인 Y를 꼬드겼다. Y는 형누나동생친구 가리지않고 무리지어 하는 뭔가 재밌어 보이는 것이 있으면 일단 끼고보는 인싸의 재질을 갖고 있다. 우리 한라산 멤버 6인은 패션유통사에서 일하는 이 인싸친구 덕분에 단체티도 맞춰버렸다.


등산에 한해 한없이 엄격한 J는 시간을 단축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리더답게 대원들의 맨뒤에서 슬렁슬렁 움직였다. 의욕은 넘치지만 저질체력인 그의 아내 L의 낙오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선두에는 또다른 연장자 S가 앞장섰다. 가장 마지막에 우리 등산크루에 합류한 그는 우리 과도 아닌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굴러들어온 돌이 되었다. 같은 과 선후배로 뭉쳐서 뼛속까지 문송한 우리 구성원사이에서 S는 ‘내가 아는 공대출신 있는데’의 역할을 맡고 있다. 운동도 꾸준히하고 무엇보다 한라산 등반 경험이 있었다. 그건 미적분을 아는 것과 동급으로 우리 중에 유일했다. 여기까지가 오로지 한라산 하나 보고 금요일 퇴근 후 제주로 향한 무모한 6인이다.


등산크루를 만들고 햇수로 3년, ‘언젠가 가야지’ 공염불의 주인공이었던 그 곳을 진짜로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찐 등산인 J가 특히 감격스러워했다. 올해는 코로나로 모두의 여름계획이 애매해진 이유로 다같이 모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킹시국을 핑계로 운동을 제쳐두고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홈트만 했던지라 체력이 금방 고갈되어갔다. 계절마다 등산에 참여하는 느슨한 연대인지라 나의 등산력은 극히 초보 수준에 머문다. 하루 전 회사 근처 백화점에서 난생 처음 아웃도어매장을 방문해 등산양말을 구입해봤으면 말 다했다. 등산 그 자체보다 내려와서 먹는 잿밥에 관심있는 패션등산러임을 인정한다. 이런 내가 한라산이라니. 백록담이라니. 역시 인생은 모를 일이다.


그런데 C는 나와 달랐다. 한라산 등반이 본인의 버킷리스트에 있었다고 했다. 버킷리스트가 있는 사람은 뭔가 멋져보인다. 그것을 진심으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사람은 대단하다. 그리고 끝내 이뤄내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내가 진심으로 감동을 표하자 다른 사람들이 버킷리스트 그거 별거아니라고 해준다. 아니 그래도 코후비기 이런건 버킷리스트에 없잖아. 대단한건 맞지. 나도 한번 생각해보면 많을거라고 친절하게 버킷선배들이 한마디씩 한다. 좋아. 한라산 등반이 6~8시간 잡는다고 하니 시간도 많고 사람들 말수도 점점 줄어들겠다 이 기회에 자아성찰 및 버킷리스트나 고찰해봐야겠다. 암만봐도 선지를 닮은 현무암을 밟으며 다짐했다. 하늘은 점점 구름이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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