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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포도 Apr 28. 2022

등산크루 르네산술:한라산편 (3)

2020 어쩌다 한라산 다녀온 일기 (3)

등산은 도대체 왜 하는 걸까

뭐하러 힘들게 높이 오를까

어차피 내려올 걸 알면서~도

뭐하러 그렇게 높이 오를까



왜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나. 누가 틀지도 않는 노래가 자꾸 뇌내반복재생 되는 경험이. 

그 땐 장기하와 얼굴들의 <등산은 왜 할까>라는 노래였다. 5집 플레이리스트 중에서도 노관심 오브 노관심 노래였는데 절실히 와 닿고 있었다. 백록담을 몇 미터 앞둔 그 때, 보이지 않는 신이 갑자기 우리 일행을 통째로 여름에서 겨울로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체감상 히말라야 4D체험이라도 하는 것 같은 혹독한 환경이었다. 다리근육의 한계에 다다르고 어느 새 자욱해진 안개 사이로 미스트 같은 빗물이 얼굴을 때렸다. 우산을 쓰기도 어려웠던 터라 제각각 후드를 뒤집어쓰거나 우비를 주섬주섬 챙겨 입기 시작했다.


해당 구역은 모두에게 난코스였던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쉬었다 가는 텀이 눈에 띄게 짧아진 것이다. 갑자기 춥고 가팔라진 그 마의 지점 초입에서 처음 마주친 젊은 세 친구 일행과는 쉬는 텀이 자주 겹쳤다. 검고 길쭉한 고깔 같은 후드우비를 뒤집어쓴 이들은 촬영 장비까지 들고 온 터라 더 힘겹게 고지대의 악조건과 싸우고 있었다.


등산로가 잘 다듬어진 유명한 산이라면 대부분 정상 즈음에 가파른 산을 오르기 쉽게 높은 계단으로 길이 만들어져 있다. 이 계단을 쌓아 올린 분은 분명 인류애가 충만했을 것이다. 등산객의 미끄러짐이나 추락사고 따위를 방지하기 위해 굳이 이런 수고를 한걸 보면 말이지. 허나 이 맘씨 좋은 분께는 죄송하지만 계단이 등산에서 가장 끔찍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다리에 무리가 직격으로 가기 때문. 무릎 연골은 평생을 두고두고 아껴쓰라던데, 산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울어대는 무릎님께 죄송해진다. 다리야 조금만 버텨줘. 곧 정상이다. 이제 백록담은 중요하지 않았다. J가 그만 쉬고 일어나자고 보챌 필요 없이 마저 다 올라가서 어떻게든 퍼질러 앉아 쉬어야했다.


“여기야? 여기 맞아?” 응 맞아 다 온 거래. 정상을 마주한 순간이 약간 싱거워보여도 이해해주기 바란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은 대부분 잔뜩 연출에 기합이 들어간 영화처럼 펼쳐진다기보다는 정말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훅 들어오곤 했다. 내 인생 가장 높이 오른 산, 한라산의 정상 백록담을 마주하는 순간도 그랬다. 제주에서 한라산을 볼 때마다 산끄트머리를 육안으로 직접 본 적이 없는 이유가 이거였다. 산중턱부터 안개 같은 구름이 무진장 걸쳐있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안 부러운 바로 그 아재감성에 취해 기념샷을 찍어댈 땐 언제고 한숨 돌리고 나니 파릇파릇한 백록담을 볼 수 없는 현실이 못내 아쉬워져왔다.


“와, 우리 빼고 다 라면 드시네.” 보지 못한 백록담만큼 아쉬웠던 게 실은 또 있었다.

“냄새 미쳤다… 라면국물 지금 너무너무 먹고 싶어요!”

“물 무겁다고 반대한 놈 누구야.”

“김밥 가져온 거 먹어 치우자. 얼른 자리잡아 얘들아.” 겨울 산행도 아니고 무슨 보온병이냐며 반대했던 J가 분열 위기의 팀원들을 애써 추스려 자리에 앉혔다. 어디에 앉아도 방어할 수 없는 라면국물의 냄새, 그리고 후루룩 소리가 우리를 괴롭게 했다. 쉬는 텀이 같았던 세 명의 디멘터 같은 사내들은 촬영장비로도 모자라 보온병에 라면까지 아주 야무지게 챙겨왔던 것이다.


어쩔 수 없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전날 밤 24시간 김밥천국에서 싸온 세상 투박한 김밥조차 꿀맛이었다. 우리는 차게 식은 김밥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싹싹 해치웠다. 분명히 우물거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무슨 대화였는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 정도로 우리는 모두가 제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지쳐있었다. 김밥이 어느 정도 채워줬지만 HP 패러미터가 머리 위에 보였으면 나는 절반보다 약간 밑돌았을 것이다.


HP가 가장 적게 닳았을 사람은 우리 중 유일한 한라산 유경험자 S. 그는 최연장자 중 하나였지만 쌩쌩한 도가니를 자랑하며 세상 발랄한 점프샷을 연거푸 시도했다. 마이클 조던 각도, 레드불 캠페인의 한장면 같은 각도, 여행에 미치다 게재를 노리는 듯한 각도 등등 다양한 고난도 포즈를 취하는 여유까지. 비실비실 올라왔던 막내 L도 인생샷의 순간에는 엄청난 점프력을 보이며 나이가 깡패라는 것을 보여줬다. 나도 뛰어볼까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무릎이 내 신체 중 가장 권위 있는 부위였기에 그 생각은 스스로가 기각했다.


“얘들아 수고 많았어. 내려가는 건 금방이니까 얼른 내려가서 고기 먹자 우리~”

J가 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하면서 하산을 재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긴 한데 당시에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어버린 나는 내려가는 건 쉬우니까 이제 힘든 건 다 끝났다고 순진하게 하산길을 시작했다. 그리곤 몇 미터 못 내려가서 L의 등산스틱 하나를 압수.. 아니 양보 받았다. 우리가 히말라야 가는 것도 아니고 왜 챙기냐고 빈정거림을 받았던 바로 그 등산스틱은 내 하산길의 하나뿐인 생명줄이자 동료이자 은인이었다. 버킷리스트에 한줄 추가. 하산하자마자 등산스틱을 구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4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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