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어쩌다 한라산 다녀온 일기 (3)
국내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을 정복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웅장해진 것도 잠시. 극심한 피로감과 관절통증, 수시로 바뀌는 기상상황, 추위와 더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고 제멋대로인 다리근육이 하산길을 막막하게 만들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는지 하산하는 내내 모두가 비교적 조용했다. 올라갈 때 싫으나 좋으나 으쌰으쌰하는 팀전이었다면 각자의 체력에 따라 각개전투 모드로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평소 운동을 즐기는 두 남자 Y와 S만큼은 담소를 나누며 단짝처럼 붙어서 내려갔다. 몸담은 산업군에 맞춘 남자패션과 자동차 이야기가 주였던 것 같다. 그들은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서 이내 보이지 않았다. 여자 셋은 높은 산에서는 그리 필요하지 않을 사회적 거리두기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지키고 있었다.
관음사 탐방로를 통해 내려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산할 때의 경치가 매우 좋아서였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봐도 백번 잘한 선택이었다. 굽이굽이 산길을 넘을 때 마다 각양 각색의 절경이 나왔다. 올라갈 때는 K-등산로 그 자체였는데 내려가는 루트는 깎아지른 절벽 산에 걸쳐진 안개구름, 그 아래 보이는 흔들다리가 마치 중국대륙의 어느 산으로 워프한 기분이었다. 돌연 근두운을 탄 도인이 등장해도 놀라지 않을 신성한 분위기에 ‘산의 기운을 받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날 정도였다.
몇 걸음 가다 멈춰 사진으로 담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았다. 우리는 정상에 도달했을 때보다 인증샷에 더 진심이었다. 아내의 페이스를 맞춰주느라 남자멤버 중 유일하게 후방 라인을 지키고 있던 J는 기꺼이 모두의 사진사가 되어주었다. 이후 저녁에 다시 되새겨볼 땐 비와 땀에 절어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진 앞머리에 조커처럼 입만 웃고 있는 사진이 앨범을 채우고 있어 경악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찍길 잘했다. 그 와중에 L은 사진이 꽤 잘나왔을 것 같다. J는 아내의 가방을 들어주면서 대원들을 재촉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사진을 찍는 것에 있어서도 그 편파적인 마음이 담겼으리라.
“이젠 표지판을 봐도 감이 안 와...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우는 등산객이 처음인가요. 김연우의 이별택시보다 슬프게 와 닿은 C의 질문이었다.
“얘들아 지금 우리 기숙사에서 000 사거리까지 간다고 생각할 때 민주광장 정도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사람 낚는 어부 J의 신종 피싱이었다. 우리가 더 걸어야 할 거리가 어느 정도 인지 가늠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학창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기발한 아이디어임을 인정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번 한라산 작전에 참여한 우리 크루 6인은 대학 동문 출신이다. 다들 졸업한지 몇 년이 지났고 나처럼 졸업 이후 단 한번도 학교를 찾아가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우리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기 때문에 종종 학교이야기를 하곤 한다.
우리학교는 캠퍼스가 넓어 안에 생태습지공원과 호수공원이 각자 다른 쪽에 꽤나 넓게 자리해 있고 모 기업의 연구단지도 있고 골프장도 있다. 셔틀버스는 물론 시내버스 노선이 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학부생이 다닐 수 있는 동선 중 정문을 제외한 가장 끝과 끝이 바로 기숙사와 우리 단과대인 언론정보대 건물이었다.
기숙사 살던 시절, 체대 벚꽃길 쪽으로 내려가서 디자인대와 가까운 호수공원을 끼고 돌아 학생회관이 있는 민주광장을 지나면 제 2공학관, 과기대가 나온다. 그 옆의 국문대까지 지나면 언정대로 가는 길이 수업가는 루트였다. 언정대는 정문과 가까워 점심시간에 밖으로 점심먹으러 가기는 훨씬 수월했다. 000 사거리는 대학가를 조금 벗어나면 있는 곳으로, 버스가 많이 다녀서 강남 등으로 놀러갈 때 자주갔었다.
Y와 S를 다시 만난 건 쉼터에서였다. 그들은 특유의 넉살로 등산객 한 분의 마음을 사로잡아 귤을 얻어먹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네시더니 짐이 무거워서 비우고 싶다며 모두에게 귤을 권해주셨다. 조그만 배낭에서 끝없이 나오는 귤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그 아저씨 덕분에 제대로 리프레시 할 수 있었다. 제주에 왔지만 오로지 한라산이 목적이기에 맛집은 커녕 감귤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는데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간식이었다. 숲멍을 때리던 중 시야에 웬 새빨간 움직임이 들어왔다.
“사장님 아니 벌써 왔어?” 감귤은인이 먼저 그에게 말을 던졌다.
“예예” 위아래 빨간 옷을 입고 범상치 않은 편광 선글라스 외 아무런 짐도 장비도 없는 아저씨였다. 가볍고 빠른 복장과 걸음 탓에 온갖 보호대와 등산스틱으로 무장을 해도 헥헥거리는 다른 등산객들 사이 군계일학이었다. 대답 또한 차림새처럼 쏘 심플했다.
“누구신데요?”
“저 사장님 지금 정상 두 번 찍고 내려가는 거에요.”
“헐 안 힘드세요??” 사회생활 짬바 평균 5년차 젊은이들의 흔한 리액션에 빨간 옷의 도인이 한번 씩 웃고 잠깐 멈췄다.
약간 다부지긴 했지만 어디서나 흔히 보이는 평범한 아저씨였다. 누가 헬리콥터를 태워서 그분만 똑 떨궈주었을 리도 없는데 어떻게 정상을 두번 이나? 감귤은인이 덧붙이는 말이 더 놀랄 노자였다.
“아니 내가 새벽 다섯 시 좀 안되어서 성판악에서 올라가는데 관음사 출발로 이미 한번 찍고 내려왔다더라고. 성판악 찍고 백록담 한번 더 올라갈 거라더니 벌써 만났어.”
“헐!! 대박! 다리 괜찮으세요?”
“와 철인3종경기 준비 중이세요?”
“대박 멋져요 체력 쩐다”
오늘이래 봤자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하루에 백록담을 두 번 찍었다굽쇼? 우리는 놀라움에 현실 리액션으로 각자 감탄을 보탰다. 갑자기 장르를 자연 다큐에서 생활의 달인으로 바꿔버린 정체불명의 빨간 옷 도인은 우리의 호들갑이 귀엽다는 듯 허허 웃을 뿐이었다. 그리곤 감귤은인이 권한 귤도 쿨하게 사양한 채 총총걸음으로 다시 가던 길을 내려갔다. 훈련중인 운동선수이신가? 엄홍길 아저씨처럼 특수부대 출신인걸까? 컨디션 난조로 해이해진 우리의 열정을 불태우고자 나타난 산의 정령인걸까?
아무래도 좋다. 우리는 두 명의 현자로 인해 어느 정도 등산 폼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얘들아 지금 이제 언정대 건물 정도까지 왔어. 저어쪽 돌계단 시작 지점이 정문나가는 곳이라 생각하고”
“…정문 이미 한참 전에 지난 거 아니구요??”
그건 절반정도 내려왔다는 의미였다. 좋아진 기분과는 별개로 여전히 길고 긴 하산길이었다.
5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