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태어나 다섯살 여름까지 충남 당진에서 살았다. 공장이 많은 곳이었고 소아과는 늘 붐볐으며, 잘 본다는 의사에게 진료보기 위해 새벽 줄서는 부모들이 넘쳐났었다. .
내 아이는 이른둥이로 태어났고 폐호흡을 못했기에 인큐베이터에 있었다. 그래서 자주 아픈 아이의 원인을 원래 아이의 약함이다라고 생각하며 지냈었다. 일년의 절반은 약을 먹은듯하고, 집에서 호흡치료기를 해주며 지내기를 몇년을 반복했다. 그냥 아이가 그렇게 태어났기에 그렇게 자주 아픈줄 알았었다.
둘째 돌무렵. 타지에서 홀로 육아에 지쳐 있던 내게 큰 아이의 잦은 기침과 병원행은 정말 지긋지긋해서 돌아버릴꺼 같았다. 어떤 달은 겨우 5번 기관에 출석을 했었다. 이 반복되는 시간들에 내가 죽을꺼 같았다. 어느날, 돌쟁이 안고 5살 큰 아이 손잡고 캐리어끌고, 아침9시 현관문 나와서 김포들러 제주도 도착하니 오후 5시 였다. 전날 의사는 폐렴으로 갈지 모른다며 약을 한뭉치 주었었고, 난 호흡치료기까지 캐리어에 담아 갔었다.
이틀쯤 지났을까.. 아이는 거짓말처럼 기침도 없어지고, 너무 멀쩡히 뛰어놀며 우리는 그렇게 열흘을 제주도 바닷가 오래된 마을에서 그저 숨만 쉬며 지내다 건강히 돌아왔다. 그후 바로, 나는 그곳을 떠나 수도권으로 이사를 했고 아이의 기침은 줄었다. 아이의 약함으로만 생각하고 환경을 의심해본 적 없던 내 무지함과 아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 봄에 미세먼지 수치가 수도권도 높아지자 아이의 기침이 또 잦아들었다. 난 제주도에 가서 2주를 보냈고, 가을에도 나의 제주행은 한번 더 있었다. 그럴때마다 아이의 기침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었다.
이 뿌연 날씨에 아이가 기침이라도 조금 하면, 내 가슴은 여전히 쪼그라든다. 공기청정기 필터를 교체하고 가습기도 청소하면서 화가 나는데, 욕할 곳이 없다. 마스크 제대로 안쓴 아이에게 언성 높이면서도 미안해졌다. 아이는 여름은 언제 오냐며, 그때는 자전거 탈 수 있느냐며 내게 물어온다. .
수술을 앞두지 않았다면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지내다 오고 싶다. 학교가 머가 중요하냐라며 떠나고 싶은데 떠날수 있는데, 갈 수 없는 현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