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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r 18. 2024

단벌 신사로 살아가는 중입니다


무얼 먼저 정리해 볼까


  세계적인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제안하는 물건 정리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순서는 정리하기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 뒤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집니다.


의류 - 책 - 서류 - 소품 - 추억의 물건


  공교롭게도 제가 '곤마리 정리법'을 접하기 전부터 이미 가장 먼저, 가장 여러 차례에 걸쳐 정리했던 물건이 바로 의류였습니다. 제게는 십여 년에 걸쳐 쌓인 옷이 한가득 있었고, 옷은 여러 가지 물건 중 그나마 가장 정리하기 만만한 상대였죠. 저는 옷을 잘 입는 데 관심이 많았고, 어린 시절 어머니는 제게 옷 사주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옷은 자연히 늘어만 갔고,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던 예전의 저는 오래되었거나 잘 입지 않는 옷이라도 '이렇게 조합해서 입으면 입을 수 있을 거야', '언젠가 한 번은 입겠지', '밖에서 안 입으면 집에서라도 입을 수 있으니까' 하는 생각에 수많은 옷을 죄다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 옷장도, 마음도 꽉 들어차서 갑갑해지고 나니 이제 잘 안 입거나 너무 오래된 옷은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비로소 섰습니다.


  의류는 또 여러 가지 세부 품목으로 나뉘므로 마리에는 의류의 정리 순서도 제시해 줍니다. 가슴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여 점점 먼 곳으로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상의(셔츠, 스웨터) - 하의(바지) - 아우터(재킷, 수트, 코트) - 양말류 - 속옷류 - 가방 - 소품(머플러, 벨트, 모자) - 이벤트 물건(수영복, 목욕 가운) - 신발


  마리에가 위와 같은 순서를 제안하는 이유는 그녀가 제안하는 정리 방식이 '물건을 만져보고 설레는 것만 남겨라'이기 때문입니다. 설렘이라는 감정은 가슴에서 느껴지므로 가슴을 덮는 상의부터 시작해 가슴에서 먼 발끝을 감싸는 신발에 이르는 순서로 정리하면 점차 '설렘의 감도'가 좋아져서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 판단하기가 수월해진다고 합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는 곤마리 정리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년 이상 입지 않은 옷은 버려라'처럼 표준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다른 정리법과 비교하면 다소 모호하게 들릴 수 있지만, 물건을 정리하는 기준을 우리의 머리가 아닌 가슴에 두기 때문에 더욱 본질적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실천해 보니 이 '설렘'이라는 것을 명확히 감지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모르겠지만 이 옷은 잘 안 입잖아?'라고 어렴풋이 속삭이는 듯했지만, 이성이 개입하고 나면 옷을 이리저리 아무리 뜯어봐도 여전히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일단 정리하는 시점에 제가 선호하는 옷 스타일을 주요 기준으로 두고 정리를 시작해서 몇 차례 정리한 뒤, 나중에 가서 정말 핵심 중의 핵심을 골라내는 단계가 되었을 때 '설렘'을 주요 기준으로 삼아 정리했습니다.




변화하는 스타일과 확고해지는 취향


  우리의 옷 스타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합니다. 유행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나이가 들면서 개인의 취향이 바뀌어서 변하기도 하지요. 저는 기본적으로 편안하면서도 단정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지나치게 캐주얼한 옷은 옛날부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죠. 그래서 티셔츠보다는 셔츠를 좋아하고 후드집업보다는 재킷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선호 경향은 어릴 때부터 쭉 이어졌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조금 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옷의 색깔도, 무늬도, 실루엣도 훨씬 다양했죠. 하지만 성인이 된 후 시간이 좀 더 지나자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가 선호하는 스타일이 더 확고하게 자리 잡았고, 그와 더불어 미니멀을 추구하게 되면서 옷을 고르는 기준이 더욱 깐깐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기준에 맞는 옷의 개수도 함께 줄어들었죠. 셔츠를 예로 들어 볼까요. 제가 셔츠를 고르는 기준은 다음과 같이 진화했습니다.


1. 상의의 종류

  '너무 편해 보이는 티셔츠보다는 편하면서도 멋스러운 셔츠가 좋아.'


2-1. 셔츠의 옷깃 모양

  '셔츠 중에서 옷깃에 단추가 달린 옥스퍼드 셔츠는 취향이 아니니 제외하자.'

☞ '일반적인 모양의 셔츠는 윗 단추를 한두 개 풀어도 목이 답답해 보이네. 네크라인이 V자로 파인 것이 낫겠어.'


2-2. 셔츠의 무늬와 색깔

  '민무늬, 줄무늬, 체크무늬까지 괜찮네. 색깔은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것으로 다양하게 선택해야지.'

☞ '민무늬 혹은 줄무늬까지만 허용하자. 색깔도 그렇게 다양할 필요는 없겠어. 차가운 색 계열로만 고르자.'

☞ '무늬가 없는 것으로만 고르자. 색깔은 무채색과 감색 정도로 제한하자.'


2-3. 셔츠의 재질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재질은 상관없어.'

☞ '디자인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구김이 잘 생기면 다림질이 번거로워서 손이 안 가는구나. 이제 되도록 구김이 안 가는 소재를 선택하자.'


  살면서 여러 옷을 경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자기만의 취향과 기준이 확고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자기만의 기준을 확실히 세워두면, 대충 보고 적당히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옷을 충동구매했다가 결국 얼마 입지도 못하고 옷장에 모셔두기만 하는 일이 없어집니다. 또 그 기준에 따라 현재 가진 옷을 분류하여 마음에 쏙 들고 편안한 옷만 남기면, 우리는 이전보다 적은 옷으로도 더 큰 만족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옷장 공간이 여유로워지니 옷들도 숨통이 트여서 옷감이 상하지 않고 잘 보존됩니다.


  옷을 정리하다 보면 간혹 지금은 잘 입지 않지만 옛날에 좋아하던 옷이라 유독 미련이 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만큼 애착이 크고 미련이 남는다면 얼마든지 남겨두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아무리 좋아하던 옷이라 한들 과거에 즐겨 입던 옷은 '과거의 나'일 뿐 '현재의 나'가 아님을 깨닫고 머지않아 좋은 마음으로 보내줄 수 있게 됩니다.



단벌 신사 31


  몇 년간 수차례의 옷 정리를 거친 끝에 저는 현재 상의, 하의, 아우터까지 해서 총 31벌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벌이었는데 최근에 옷 선물을 받아서 31벌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계절별로 옷차림이 달라져야 하고, 저 31벌에는 집에서 입는 실내복도 포함이다 보니, 사실상 거의 단벌 신사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지요. 훨씬 더 다양한 색상과 스타일을 시도하던 옛날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소박해졌나 싶기도 하지만, 단순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멋도 화려함 못지않게 매력적입니다.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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