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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Mar 25. 2024

아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가장 놓기 힘든 그대, 책


  정리 과정을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직접 물건을 마주하고 정리 작업에 돌입하면 정리하기 마냥 쉬운 물건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건 이래서 미련이 남고, 저건 저래서 미련이 남았죠. 그중에서도 책은 제게 가장 이별하기 어려운 물건이었습니다. 곤도 마리에의 이론대로라면 의류를 정리한 뒤 두 번째로 정리하는 품목이 책이니 일반적으로는 비교적 정리 난도가 낮은 편에 속하겠지만, 제게는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정리한 물건이고 여전히 다 놓지 못한 품목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쉬웠어요


  가장 먼저 정리 대상이 된 책은 오래되어 먼지가 쌓이고 습기가 차 곰팡이가 핀 책이었습니다. 이런 경우 책의 내용에 미련이 남을지라도 위생상의 문제가 있으므로 놓아주기가 쉬웠습니다. 제가 정리를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이 버린 물건이 옷과 더불어 책이나 각종 수업 자료 같은 종이류인데, 십수 년에 걸쳐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를 보며 저는 종이도 마치 음식물을 보관하듯 신경 써서 보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종이는 며칠 혹은 몇 달간 아무 곳에나 내버려 둔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지만, 그것만 믿고 온도나 습도가 부적절한 장소에 오랫동안 보관하면 금세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생겨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고대 유물이 되고 맙니다. 오랜만에 꺼내 읽더라도 기분 좋은 종이 냄새를 맡고 손도 산뜻하게 유지하려면 책에게도 쾌적한 거주 환경을 제공해 주고 이따금 바람을 쏘이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책의 가치는 '읽는 행위'에 있는 법이니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책을 놓기 어려운 이유


  한창 번역 공부를 할 때, 강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번역가는 독자의 지적 허영심도 채워줘야 해요."


  번역가는 외국어로 쓰인 글을 우리말로 바꾸어 국내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기본적으로는 원문 내용을 최대한 그대로 살려서 옮기지만, 외국인 독자의 배경지식과 우리나라 독자의 배경지식이 다르므로 때로는 '옮긴이 주'를 활용해 부가 설명을 덧대야 합니다. 부가 설명 없이는 국내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와 동시에 번역가의 개입이 지나쳐도 안 됩니다. 원문의 흐름을 방해할 수도 있고, 강사님의 말씀처럼 독자의 지적 허영심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강사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책을 대할 때 '지적 허영심'이라는 단어를 미처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책은 지식이나 사상 등을 전달하는 도구이고,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똑똑해지는 기분을 즐깁니다. 그런데 독자의 지식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유치원생을 대하듯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지나친 친절을 베풀었다가는 독자의 빈축을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책을 선뜻 정리하기 어려웠던 이유도 어쩌면 지적 허영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사놓기만 했을 뿐 읽지는 않았더라도 책이라는 유형의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책에 담긴 무형의 지식을 소유한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요. 그럴 때마다 저는 필사해 둔 《정리의 힘》 속 문구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글자를 읽어 정보를 얻을 때 책은 진정한 역할을 한다. 책에 쓰인 정보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책장에 책이 꽂혀 있다’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적 허영심과 더불어 책을 정리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혹시 나중에 이 책이 필요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습니다. 실용적인 정보성 도서가 이에 해당했죠. 물론 정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도 있고 다시 살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영 귀찮고 아까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다 읽은 책인 데다 나중에 정보를 얻고자 이 책을 다시 들여다볼 가능성은 희박하단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미처 다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여전히 끌어안고 사는 책이 다섯 권 있습니다. 언젠가는 미련을 마저 내려놓고 이 다섯 권의 책도 훌훌 보내줄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설렘을 주는 책


  곤도 마리에는 책을 정리할 때 '만졌을 때 느껴지는 설렘'과 더불어 '시기'를 중요시합니다.


  "읽지 않은 책은 과감히 전부 버리자. 여러 해 방치된 읽지 않은 책보다 지금 읽고 싶은 책, 읽고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많이 쌓아두지 않으면 오히려 정보의 감도가 높아진다. 즉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깨닫기 쉬워진다는 말이다."

  "책은 시기가 생명이다. 만난 ‘그 순간’이 읽어야 할 때다. 순간의 만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은 쌓아두지 말자."


  정말 공감이 되는 문장들이었습니다. 옛날에 사두고 오랫동안 읽지 않은 책, 소위 '언젠가 읽을 책'은 묘하게 부채감을 안겨줍니다. 또 새로운 책을 찾아 나서려다가도 이미 있는 책부터 먼저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정작 지금의 내게 설렘을 주는 책을 만나지 못하고 멈칫거리기도 하지요. 여러분은 유튜브를 보다가 '나중에 동영상' 목록을 들여다본 적이 있으신가요? 처음에 영상을 발견했을 때는 썸네일을 훑어보고 관심이 생겨 '나중에 볼 동영상' 목록에 추가해 두지만 정작 그 '나중'이 되어도 어쩐지 지금은 보고 싶지 않은 느낌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책이든 영상이든 만난 시기가 생명인 것은 매한가지인가 봅니다. 여하튼 이 사실을 깨달은 덕분에 저는 사두고 읽지 않은 책은 물론이고 과거의 추억이 깃든 책도 잘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주로 어릴 적 닳도록 읽었던 만화책(예. 그리스로마신화)이 이에 해당했죠. 그래도 못내 아쉬운 마음에 몇 번이고 다시 책을 들여다봤고, 그러면 다시금 설렘이 피어올랐지만 결국 그 책을 읽고 즐거워하던 사람은 '과거의 나'였음을 기억하며 보내주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지금의 나'를 설레게 할 책을 마음껏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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