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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연 Apr 22. 2024

나는 구두쇠입니다


  자린고비 영감 이야기를 아시나요? 굴비를 줄로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밥 한 술 뜨고, 굴비 한 번 쳐다보면서 "아이고, 짜다"라고 했다죠. 당장 굴비를 소비하지 않고도 상상력을 빌려 한 끼를 해결하다니, 어릴 때 이 이야기를 읽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자린고비 영감 이야기는 지나칠 정도로 절약하는 행태를 꼬집는 풍자라고 볼 수 있지만, 어릴 때 교육받은 내용을 돌이켜보면 물건을 아껴 쓰라는 말은 들었어도 버리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본래 인색한 기질이 있는 데다 말도 참 잘 듣는 아이였던 저는 투철한 절약 정신을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한몫했고요. 아직 쓸 수 있는 물건을 버리는 건 당연히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고, 어떻게든 물건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쓰고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센티미터도 채 남지 않은 몽당연필을 깍지까지 씌워서 사용했죠. 공책도 반드시 앞뒷면을 모두 사용했고, 심지어 단원이나 단락을 구분하기 위해 몇 줄 띄우는 것조차 아깝게 느꼈습니다. 한 학년이 끝나도록 다 쓰지 못한 공책은 마저 쓰려고 남겨두었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절약의 극단성은 비교적 줄었지만, 제가 가진 물건은 계속해서 정체되었습니다. 특히 필기구나 공책이 참 많이도 쌓였습니다. 직접 산 경우도 있었지만 받은 것도 많았고,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업체 홍보용 볼펜조차 좀 뻑뻑해도 아직 잉크가 나온다는 이유로 아득바득 사용했으니 물건이 좀처럼 순환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정작 마음에 드는 볼펜은 쓰지 않고 모셔두었고요. 영 소진되지 않는 물건을 보며 '뭔진 몰라도 이건 아니다'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정리와 미니멀리즘을 접하면서 그간 제가 해온 행동이 진정한 절약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아끼다 똥 된다'라는 말처럼 오히려 낭비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자린고비 영감 이야기로 따지자면 굴비를 천장에 매달아 두고 보기만 하다가 정작 굴비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를 놓쳐서 굴비가 상해버린 셈입니다. 어떤 물건이 진짜 마음에 들고 사용하고 싶었던 순간에 쓰지 않고 아끼다가 결국 시기를 놓쳐 못 쓰게 되거나 취향이 변해서 그 가치를 잃어버리면 그만한 낭비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물건을 쓸데없이 모셔두기에는 물건뿐 아니라 '물건을 보관하는 공간이 아깝다', '우리는 물건의 월세를 내주고 있다'라는 이야기도 가히 충격적이었죠. 단순히 무작정 '아껴 쓰라'는 메시지에 매몰되어 있다가 정리와 미니멀리즘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접하고 실천하면서 저는 정말 아까운 게 무엇인지 알고 물건을 올바르게 아끼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게 다 돈인데


  큰맘 먹고 정리와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다 보면 여러 가지 벽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해 미련을 뚝뚝 흘릴 때도 있고,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에 익숙지 않은 가족이나 주변인이 경악에 찬 눈길을 보내기도 합니다. 버리려고 내놓은 물건을 본인이 쓰겠다며 가져가기도 하고요. 물론 물건이 새 주인을 잘 찾아간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당장 아까운 마음에 자기에게 필요도 없는 물건을 가져가는 경우도 왕왕 있을 겁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다 돈인데."


  저보다 조금 더 급진적으로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언니가 버린 물건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죠. 아마 제가 물건을 정리할 때도 내색은 덜 하셨지만 적잖이 마음이 쓰리셨을 겁니다. 어머니의 말씀은 정말 맞습니다. 물건을 사려면 돈을 내야 하니 결국 물건은 다 돈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 더욱이 물건을 함부로 구매해서도 안 되고, 아끼다 똥 만드는 짓도 그만해야 합니다. 무엇이 진짜 낭비인지 알고 현명하게 소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물건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게에 빼곡히 진열된 상품들, 수북이 쌓인 재고를 보면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척 봐도 굳이 필요 없는 물건도 많고 설령 필요한 물건이라 한들 생산량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저 많은 물건이 다 팔리기나 할까, 남은 물건은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들죠. 명품 브랜드에서 물건 가격을 낮추지 않고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멀쩡한 물건을 소각한다는 이야기도 처음 들었을 때는 놀랐지만, 지금은 '명품도 저렇게 태워버리는데 무분별하게 생산되는 조악한 싸구려 물건들은 얼마나 더 쉽게 버려질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생산 단계에서 적당량만 생산되면 참 좋겠지만, 일개 소비자의 막연한 바람으로는 대량 생산을 막기 힘듭니다. 하지만 소비자로서 할 수 있는 일도 분명 적지 않지요. 단지 싸다는 이유로 쉽게 사서 쉽게 버리는 것, 불필요한 물건을 충동적으로 구매하는 것, 다 쓰지도 못할 물건을 쌓아두기만 하는 행위는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뿐 아니라 소비자 본인의 만족스러운 소비 생활을 위해서라도 멈추어야 합니다.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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