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설친 하루다. 오후 5시가 다가오니 피곤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뭔가를 더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보단 어디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햇볕이라도 조금만 덜 뜨거웠으면 돗자리 깔고 공원에서 낮잠을 즐길 텐데 그러기엔 태양이 작열한다.
숙소가 도시의 중심가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이점이다. Light rail을 타고 5분 만에 도착한 숙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폭신하고 안락한 곳이다. 금방 곯아떨어졌다. 깜짝 놀라 일어났다. 생전 코 골아 본 적이 없는데 코골이도 한 느낌이다.
공연 시작은 저녁 7시 30분. 6시 50분이 되어서 트램을 타고 Circular Quay 역에 내렸다. 역에서 오페라 하우스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한다.
노을이 지는 순간의 시드니 하버 브리지는 또 다른 아름다운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사진으로만 보던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가 있다. 사진 속에 일부가 된 느낌이다. 그만큼 황홀하다.
이 날은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마지막 상영날이다. 계획 없이 호주로 온 지라 공연 예매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호주에 도착해서 예매창을 확인했을 땐 매진이었는데, 전날 생각 없이 들어가서 취소표를 얻었지 뭐람! 가격은 비싸지만 그 이상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177달러의 티켓 값을 지불하고 들어온 M열 3번 자리. 들어가는 문 입구 번호도 무려 22번이다. 문이 대체 몇 개 있는 걸까. 그 많은 좌석이 관중으로 가득 차 있다. 설렘으로 북적이는 소란스러움도 듣기 좋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미스 사이공>의 내용을 모른다. 그냥 지금 호주에 왔고, 시드니에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오페라 하우스의 뮤지컬이 <미스 사이공> 뿐이었고, 난 그저 오페라 하우스의 공연을 즐기고 싶었고.
내용도 모르지만 영어는 더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뮤지컬 볼 때도 모든 대사를 들어가며 보는 타입은 아니다. 전체적인 연출과 분위기, 배우의 제스처와 목소리에 더 집중한달까.
빠르게 흘러가는 뮤지컬. 80% 이상의 대사는 그대로 날아가버린다. 하지만 그럴수록 난 화려한 배경을 준비한 스태프들의 노력, 조명이 꺼진 부분에서도 열심히 연기하는 조연들, 아래에서 연주하는 오케스트라까지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용을 모르고 가니 반전이 있을 때 흠칫 놀라는 순간들도 많았다.
언어를 몰라도 모든 서사가 이해가 되는 예술의 힘이 대단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다.
기립박수가 저절로 나오는 공연이다. 아름다운 경험은 이 밤을 더 빛나게 만든다. 호주와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