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완성시킨 숨은 주역들
6화 조공(진짜 조연)
조공 [助攻, Supporting Attack]
(출처: 네이버 군사용어사전)
공격작전시 주공의 성공을 돕기 위하여 적으로 하여금 주공의 공격방향을 알 수 없게 기만하고
적이 주공방향으로 증원하지 못하게 하거나 또는
적의 예비대를 조기에 조공지역으로 투입하도록 강요하여 주공작전의 성공을 지원함.
조연은 공격작전시 조공과 같은 존재이다. 주연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엑스트라의 동경을 받기도 하고 가끔 주연보다 더 빛날 때도 있다. 포커에서 조연은 망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의 조연은 훈훈함과 따뜻함을 품어주고 깊이를 더해준다. 연말 시상식 때 조연의 역할에 대해 의미를 되새기고 많은 사람들이 감사한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를 슬픔과 아쉬움을 머금고 있다. 그래도 난 조연의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 많은 이들의 사랑과 질투를 한 몸에 받는 것보다는 조금 사랑받고 누군가를 더 빛나게 만들었을 때 만족감이 더 크다. 특히, 내 운명이라는 주연이 더 빛나게 하기 위해 나를 태우는 게 행복하다.
레바논에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연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었고, 우리가 운명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삶에서는 주연이겠지만, 우리 사랑이야기 속에서 조연으로 충분한 역할을 해줬다. 너무나 감사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남는다.
현지 통역인 비르나(가명)는 인접 부서 통역인이었다. 다른 여성 통역인보다 확연히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 그래도 30대 초반이었다. 중동지역 사람들은 20대까지는 어려 보이다가 서른이 넘어서면 외모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동료가 더운 나라 사람의 특징이라고 했는데,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6개월간 지켜본 결과 어느 정도 타당했다. 당시 내가 30대 초반이라 나를 기준으로 어리고 늙었다는 것을 구분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비르나는 말투와 행동이 우아했고,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듯한 투명한 눈을 가졌으며, 긴 파마머리인데, 이상하게 생머리 느낌을 주면서 동서양이 오묘하게 겹쳐 보였다. 유독 검은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던 사람이다. 특별한 에피소드는 없었지만, 레바논에서 바다 건너에 있는 사이프러스 치즈를 가져와서 한두 번 맛보라고 권했던 게 생각난다. 귀국 일주일 전에 현지에서 찾을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을 어렵게 구해줬는데, 아직까지 감사 표현을 제대로 못한 게 아쉽다. 다시 볼 수 있다면, 꼭 보답하고 싶은 사람이다.
운호는 막냇동생 같다. 항상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며, 소소한 일까지 많은 것을 도와줬다. 필요한 게 있어서 부탁을 하면 한걸음에 달려왔고, 매번 옆에서 호위무사처럼 지켜줬다. 허세가 조금 있긴 한데, 단단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원래 막내 동생의 멋은 허세다. 지금은 더 큰 일을 하며, 가끔 소식을 전해주는데, 여전하다. 우리와 비슷한 사랑을 해서 더 애틋하다.
진홍은 신부님보다 복음을 멋지게 전파한다. 함께 다니던 성당은 신부님이 상주하지 않는 공소였다. 누군가 신부님 역할을 해야 했는데, 다른 신부님들께 죄송하지만, 지금껏 지켜본 사람 중에 가장 신부님 같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영화에서 그려진 신부님의 모습이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수 있다. 논리적이며 깊은 생각을 차분한 말투와 진지하게 전달하는 깊은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다. 큰형 같은 존재였고, 한 번은 내 운명과 나를 연결시키고 싶어서 각자에게 만나보라고 권유했었던 소소한 에피소드도 있다.
영일은 나이 차이가 안 느껴진다. 가볍게 다가올 수 있게 해 주고 만물박사처럼 이것저것 설명도 잘해준다. 내 운명과 동향이라 친근감이 느껴지는 남도 말투가 좋았다. 얼리어답터라 각종 장비에 대한 지식도 탁월했고, 해 질 녘 지중해 쉼터에 가면 각종 장비와 인생사에 대한 조언과 즐거움을 전해줬다. 지금은 서촌에 직접 집을 지어 살고 있는데, 서촌에 갈 때마다 늘 생각나는 사람이다.
운식은 친형 같은 존재이다. 항상 내 주변에서 소리 없이 지켜보는 사람이다. 소중한 추억 속에 항상 같이 있었다. 농구 대회도 함께 팀을 만들어서 나갔고, 6개월간 사무실과 방을 같이 썼다. 매일 운동도 함께 했으며, 하루 세끼도 옆에서 먹었다. 유독 뒷모습을 많이 봤는데, 듬직한 어깨와 남들은 잘 모르는 귀여운 미소가 남아있다. 친구 같았고,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도 보고 싶고 만나서 같이 농구하고 싶다.
광원은 그곳에 함께 있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내 인생에 불쑥 나타나서 도움만 주고 사라진 사람이다.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한 감정이 지금껏 남아 있다. 다시 찾아가서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광복절에 태어난 인덕은 우리를 지켜주고 믿어 주었으며,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아버지 같은 분이다. 내 작은 가치관 중에 하나인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추억이 많은 사람이다'를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하다. 흠이 하나 있다면, 나보다 내 운명을 좋아하는 거지만, 덕분에 지금껏 잘 살고 있다.
사랑은 둘이서 만든다고 글로 배웠다. 하지만, 우리 사랑은 둘로는 부족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조력하여 만들어졌다. 레바논에서 우리 삶의 주인공인 내 운명을 위해 조연은 나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조연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그들 덕분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고, 함께 소중한 이야기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