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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Mar 07. 2022

첫째가 삼 학년이 되었습니다


첫째가 삼 학년이 되면서 이 학년 때와 다르게 학습 과목이 여러 개로 나뉘었습니다. 지금껏 수영장에서 놀았다면 이제는 심해로 들어가서 유영하는 모습입니다. 딸이 새로 받은 교과서를 가득 안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국어와 수학, 과학과 음악 교과서였는데, 알록달록한 교과서를 보면서 예전 우리가 활용했던 교과서가 생각납니다.



다른 과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고등학교 때 국사 교과서만 머릿속에 남아 있네요. 그렇다고 제가 국사를 잘한 것도 아닙니다. 창호지와 어울리는 누르스름한 색에 국사라고 쓰여있었고, 상하권으로 분리되었던 것 같은데, 몇 해 전 헌책방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큰 딸은 노르스름한 옛 기억을 떠오르게 해 준 교과서를 펼쳐놓고 학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큰 딸이 좋아하는 보라색이거든요. 과학 교과서는 중간에 고래가 그려져 있는데, 고래 몸은 은박 코팅이 되어 빛을 반사합니다. 시크릿 쥬쥬 스티커 북인 줄 알았습니다.


MZ세대까지는 어떻게든 따라갔는데, 이 환상적인 세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넓게 볼 수 있는 눈과 미묘한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소머즈가 되어야겠습니다.

극성 부모는 아니고 싶지만 큰 딸이 학원을 네 곳이나 다니기 때문에 교과서만으로 교육에 전념하는 집은 아닙니다. 조금 핑계를 다면 태권도는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줄넘기가 재미있다며 태권도를 보내달라고 졸라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여섯 살 때 엄마처럼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고 해서 두 곳을 꾸준하게 다니고 있지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만들기를 좋아한다며 요리와 미술을 함께하는 미술학원까지 다닙니다. 저보다 조금 극성인 부녀제 큰 딸에게 국제화 시대 영어의 필요성주입시켜서 스스로 다니고 싶어 하게 만들었죠.

교육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다가 최근 연말정산 때 예년보다 많은 돈을 돌려받아찜찜하지만 좋은 기분을 느낍니다. 본인이 힘들지 않다면 문제가 없는데, 가끔 너무 많이 다닌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그럴 때마다 줄이자고 하는데, 은근히 즐기면서 여러 개를 배우는 자부심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누가 생각납니다.



저는 어려서 형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학원 다니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유년 시절, 달동네에 복지회관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90년대에 무슨 야학 같은 것을 하면서 대학생 선생님들께서 이것저것 가르쳤많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때 배웠던 진달래란 건전한 가요도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있네요.


학창 시절, 인천에서 유명한 한샘학원 단과반 영어를 신청해서 다녔는데, 제때 수강 신청을 못해서 수업을 몰래 듣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정도로 학업에 진심은 아니었는데, 아마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이유였을 겁니다.

큰 딸이 고스란히 닮았네요. 방과 후 학습 중 미니어처 모형 만들기와 건축물 만들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 학원 스케줄을 조절하는데, 영어 시간은 절대 바꿀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말하지 않다가 결국 친한 친구들과 함께 학습고 싶다며 이실직고합니다. 


이해는 되지만 제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현실 아빠입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수업하면 영어공부는 더 안될 텐데"

어쩔 수 없이 아내와 통화하면서 영어수업은 고정시키고 다른 수업들을 이리 넣어보고 저리 가져가 봅니다.



스케줄 조정을 마치고 극성 부모라는 두꺼운 껍질을 벗기기 위해서 사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합리화합니다. 부모가 함께하지 못하고 할아버지, 할머니 육아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묘책이라며 포장합니다.


그러면서 놓치지 않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말썽꾸러기가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에 방점을 찍습니다. 그 아이가 더 착했으면, 그 아이가 말을 잘 들었으면, 그 아이가 조금만 예뻤으면 하고 푸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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