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만 빼고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천천히 걸으며 친구와 나눴던 글과 생각마저도 그만두고 싶었다.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만들어자신을 숨겼고,걱정하며 응원하는 친구들에게 괜찮다는 거짓 가면을 쓰고 마주했다. 모든 것을 내려놨기 때문에 편안한 상태라고읊조리며 스스로 위로했다.
짧지 않은 시간 방황했는데, 우연히 접한 글을 통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다시 글을 쓰려고 하니까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다. 마흔 해 넘게 살며 고작 일 년 정도 글과 가깝게 지냈을 뿐이고 단지 한 달만 쉬었는데, 연필 쥐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느낌이다.
회복하기 위해서 지난 일 년 동안쓴 글을 다시 읽었다. 어색하다. 감정과 생각을 마구 발설하고 제대로 다듬지 않은 결과이다. 깊은 사고를 통해서 표현하고 완성한 글이 아니라 순간의 느낌과 단상을 맥락 없이 휘갈겼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글을 공부했고 글 한편 쓰는데수십 번 이상 퇴고하여 완성한 좋은 글 사이에서 못 배운 주정뱅이가 뜻도 모르는 외계어를 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쉬면서 글을 멀리 했더니 내 글 수준이 보인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꼭 집어낼 수 없다. 그나마 일 년 동안 매일 쓴 결과물이 형편없는 단어의 집합체라는사실은 알게 되었다.
글을 다시 쓰기로 결심하자마자 숙제를 선물 받았다. 글 벗과 함께 작가를 만나는 시간에 글 한편을 써서 제출해야 한다. 다섯 개 발췌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생각과 감정을 글로 표현해야 한다. 게다가 평소 좋아하는 작가와 글방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합평까지 한다. 한동안 쉬었기 때문에 문장 한 줄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평생 부끄러움 없이 살았기 때문에 결국 괴발개발 쓰고 웃으면서 합리화할게 뻔했지만, 이번만은 조금 다르고싶었다. 왠지 글쓰기의 큰 변곡점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발췌문 다섯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 마저 버겁다. 수개월 습작하는 동안 주제를 선정하여 글 쓰는 연습을 꾸준하게 하니까 어떤 주제가 결정되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글을 쓸 순 있다. 당연히 수준은 형편없다.하지만 이번만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닌 온전히 나를 위하거나 나만을 향하는 글을 쓰고 싶었기에 더욱 신중했다. 독자를 위한 글이 아니면 글의 가치는 떨어질 테지만, 온전히 나답게 글을 쓰고 싶었다.
다섯 개 글 중에 캐럴라인 냅이 생각나는 '먼길로 돌아갈까'를 선택하여 외로움과 고독을 표현하고 싶었다. '에이미와 이저벨'을 골라서 다시 찾아온 불안장애를 다루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내 감정과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일(Job)에 대해서 솔직하게 다루고 싶었다. 나를 향한 글에 가장 가까운 주제였다. 나를 멈추게 한 것도 결국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에 시선이 계속 머물렀다.
지금껏 스무 해 넘게 했던 일은일반적인 직업은 아니다. 아저씨 원빈이나 나의 아저씨 이선균처럼 내 직업 뒤에도 아저씨가 따라온다. 다른 어떤 직업보다 사명감을 가져야 하며, 심지어는 숭고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무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무한책임을 지며 부여받은 임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껏 일을 통해서 얻는 행복이 클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취감이나 자기 효능감이 나타날 수 없었고, 잠시 발현되어도 금세 식었으며, 오히려 번 아웃과 현실 부정만 늘었다. 다른 돌파구를 찾으려다 보니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제자리에서 몸부림만 치는 것 같았다. 단지 예쁘게 포장하고 웃는 얼굴 뒤에서 숨을 죽이며 아파했다.
올해로 정확하게 스무 해 일했고, 앞으로도 열 번은 같은 옷을 입고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지금처럼 일상보다는 비일상을 바라보며 사는 태도를 버리고 싶다. 일과 일이 아닌 영역을 구분하여 일로부터 벗어났을 때 행복을 찾기보다는일을 통해서 평온을 얻고 싶다.
최근 함께 글을 나눈 친구의열정과 전문성을 보고 반한적이 있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에 가까웠다. 일을 통해서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내 가슴속에 스며들어야 할 기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동일해질 수 없다는 것을깨닫게 되었다.
삶에서 일을 뺀다고 해서 모든 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온전하게 남지도 않는다. 삶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일에서얻는 행복이 크지 않다면, 결국 퇴사나 이직뿐이라는결론에 닿고 싶지도 않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고 그럴 용기도 없다. 그냥 단 한 번의 삶 속에서 일을 통해 가슴 뛰는 시간을 더 만들고 싶을 뿐이다.
3 - 1 = ?
일산 소재 독립 책방 '너의 작업실'에서 '한수희 작가와 글쓰기'에 제출했던 과제를 퇴고하여 발행합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글을 쓰는 상황이다 보니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당시 감정에 충실하게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