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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30. 2022

루틴이 없는 게 제 루틴입니다

루틴 실패자의 변명

경기 중 마시던 음료수 위치와 로고 방향까지 정확하게 일치시킨다. 서브를 넣기 전에는 좌우측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 넘기고 코와 귀를 한 번씩 만지며 공을 땅에 여러 번 튕긴다. 루틴이 일정하기로 유명한 테니스 스타 나달 이야기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윔블던 테니스 대회에서 조코비치가 우승하면서 세계 최강 타이틀을 양보했지만, 테니스를 모르는 '테린이'들도 잘 아는 세계 3대 테니스 스타이다.

루틴이 중요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다. 검색하면 관련 글이 수천 개가 나오고 중요성에 대한 예찬과 루틴을 완성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대부분 '루틴은 승리 공식이니 자신만의 루틴을 잘 만들어서 성실하게 행하라'는 루틴 복음 8장 23절 말씀을 설파한다. 루틴은 삶의 진리란다.

예를 드는 경우도 비슷하다. 테니스 선수 나달, 야구선수 커쇼와 류현진 그리고 스포츠 스타 박태환과 김연아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커쇼는 선발 일정에 맞춰 모든 동선을 조절하며 일상을 관리한다.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생체리듬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스스로 강한 신념을 담아서 인지영역까지도 준비하는 것이다. 루틴 복음 선교사들은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 루틴으로 최고에 위치했다는 신뢰성 높은 증빙 자료를 제시한다. 루틴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성과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이 정확하게 루틴을 완성하려 해도 로봇이나 컴퓨터를 따라갈 수 없다. 완벽한 루틴이 장착된 로봇과 컴퓨터는 오히려 루틴을 파괴하고 변칙과 혁신으로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려는 추세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AI와 딥러닝이 그러하다.

지금껏 루틴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사람이 터무니없는 궤변을 늘어놓는 게 맞다. 일 년 가까이 진행했던 미라클 모닝도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매번 달랐고, 이십 년 동안 같은 일을 하는데, 출근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스포츠 스타는 아니지만 운동할 때 일정한 습관이나 패턴도 유지하지 않는다. 볼링은 볼 무게와 에이밍 스폿이 일정하지 않고, 수영은 호흡할 때 수면 위로 나오는 얼굴 방향이 매번 다르다. 농구는 백보드를 맞추고 골을 시도하는 뱅크 슛을 던질 것인지 골대를 직접 노리는 클린 슛을 할지 손에서 공이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골프는 최악이다.



그래도 즐겁게 살아간다. 일정하지 않고 패턴도 다르며, 철저한 루틴 없이 살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다. 가끔 주변에서 부지런하고 성실하다는 평도 듣는다. 심지어는 루틴을 잘 지키는 후배와 시합해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루틴의 사전적 의미는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이지만, '지루한 일상의 틀과 판에 박힌 일상'의 뜻도 있다. 사전(옥스퍼드 영한사전)에 쓰인 활자를 보면 마치 영국 사는 옥스퍼드가 제발 지루하지 않게 격식 좀 파괴하고 살라며 권유하는 것 같다. 너무 틀에 박히지 않게 원하는 대로 살면서 가끔은 일상과 비일상을 유영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어쩌면 한번 사는 인생이기에 틀어져야 오히려 살 맛 난다.

루틴교 선교사 가르침대로 루틴은 중요하다. 하지만 세밀한 방법으로 꼼꼼하게 따지면서 조금 틀어진 것까지 맞추려고 연연하지 말고, 큰 방향성을 정하고 실천에 집중해야 한다.

삼 년째 주 3회 이상 5km씩 달린다. 한 때 달리는 거리와 자세 심지어는 호흡까지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더욱 힘들었고, 결국 하기 싫어졌다. 루틴을 만들려다가 아무것도 못할뻔했다. 일정함과 루틴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시간과 공간에서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루틴이 다른 누군가의 기준에는 일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얼마나 뛰었느냐 보다 그냥 뛰었는지 여부가 중요할 수 있다.


글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 칩거하는 것보다 좋은 곳을 여행하거나 산책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면서 만물을 오감으로 느끼는 게 좋다. 유명 작가가 방송에서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글을 쓰는 루틴이 필요하다고 말해서 매일 아침 6시 전에 글을 쓰고, SNS에 꾸준하게 올렸다. 매번 같은 환경에서 비슷한 상태로 여러 편 썼는데, 소재가 겹친다. 다른 내용을 풀어가다가도 비슷해진다. 차라리, 밖에 나가서 달리거나 걸으면 새로운 글감이 스며들면서 문장이 잘 연결된다. 그래도 이른 아침 매일 글쓰기는 계속해야 한다. 루틴은커녕 마흔이 넘어서면서 머리가 가장 맑은 시간이 그때뿐이다. 다른 모든 시간은 이른 아침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일과 스포츠 그리고 글쓰기는 어느 정도 비슷하지만 육아는 크게 다르다. 아무리 루틴을 만들어도 두 딸이 바꾼다. 특히 우리 집에 사는 다섯 살짜리 아이는 모든 루틴을 파괴한다. 아마도, 루틴 이야기를 하면, "루틴이 뭐야"를 백번 물어볼 것이다. 곧 그 아이가 다가오는 휴일 아침 8시가 두려워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지, 루틴 복음을 설파할 수 없는 신비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다.

비약이지만 계 최고 루틴 나달의 시대는 끝났다. 조코비치도 루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루틴의 상징이 저물어가는 시기에 작은 기대를 품는다. 인생 만화 슬램덩크에서 매일 수천 번 슛 연습을 통해 농구 황제가 된 서태웅보다 변화무쌍 강백호가 주인공인 것처럼 루틴 없이 슬렁슬렁 사는 우리가 주인공이 되는 날을 기대한다.





* 작년 윔블던 대회가 진행하던 시기에 작성했던 글을 비슷한 시기에 꺼내서 많이 다듬었습니다. 일 년 전 글을 퇴고하면서 꾸준하면서도 변한 저를 돌아봅니다. 글 수준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이제라도 제대로 루틴을 정해서 습작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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