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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Sep 12. 2023

한 학급에 반장은 한 명입니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학급임원 선거가 한창이었다. 큰딸은 두 번 연속 부반장 경력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반장에 도전하겠다며 지난 학기부터 출마를 선언했다. 개학하고 선거까지 일주일 정도 주어진 기간이 선거 준비를 위한 중요한 시기인데, 아데노바이러스에 걸리는 바람에 등교조차 못했다. 선거는 사흘정도 남았는데, 병원에서는 등교가 힘들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딸은 선거 당일에 등교만 해도 승산은 있다고 했다. 지난 학기에 부반장 역할을 잘 수행했고, 방학 때도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관계를 잘 형성했다며 학급 전체 인원 중에 몇 명 정도가 자신을 뽑기로 했다는 말을 건넸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게 보였다.



아프기 시작했던 이튿날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책상에 앉아서 발표문을 작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아이 욕심으로만 치부할 순 없었다.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대견했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 이틀 정도 아프고 반장 선거 하루 전에 등교할 만큼 나아졌다.



발표문을 검토해 달라고 했지만 늘 그렇듯이 네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다만, 반장을 하고 싶은 이유를 잘 설명해서 친구들이 공감하도록 쓰라고 조언만 했다. 사실 발표문을 폰으로 몰래 찍어 사무실에서 읽었는데, 제법 자기 생각이 묻어 있었기에 알아서 잘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선거 당일, 아내를 통해서 다른 친구가 반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큰딸은 선거가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선거과정까지 상세히 설명했을 텐데, 선거이야기는 쏙 빼고 불닭볶음면 먹으러 편의점 간다는 말만 전했다. 짧은 시간 동안 정적만 빼고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통화였다.



늦게 퇴근해서 집에 왔더니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더 이상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큰딸 심경이 궁금했지만, 다음날 아침까지 참고 기다렸다. 이른 아침에 명상과 스트레칭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큰딸은 잠에서 깨어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와 얼굴을 마주하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안아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팔을 벌려 꼭 안아줬고 딸은 웃으며 반장은 다른 친구가 한다고 말했다.



반장이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나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솟는 감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편도체를 조작하여 완벽하게 학습한 AI처럼 무난한 답변다. 그럴싸하게 잘 지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아빠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주말에 신나게 놀아주겠다는데, 큰딸은 선약이 있다고 했다.



반장이 된 친구와 함께 스타필드에 놀러 가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멈칫했다. 나는 나와 경쟁해서 이긴 사람과 함께  수 있을지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딸이 신기하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감정을 추스르고 잘 지는 법을 익히면 되는 줄 알았는데, 졌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딸 생각에 고개가 숙여졌다. 다시 생각해 보니 경쟁으로만 생각한다 한 학급에서 반장을 제외한 모두가 것이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딸 덕분에 잘 지는 법이 아닌 잘 사는 법을 배웠다.





* 한 줄 요약

이기는 법과 잘 지는 법이 정답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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