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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남세아 Jul 12. 2021

아빠, 편지 좀 주세요

I0234_ep. 45 어쩌면 두 딸의 육아일기 #3




"아빠, 편지 좀 주세요!"


 일요일 오후, 조용하게 글을 쓰고 있는 나에게 큰딸이 다가와서 말한다. 갑자기 무슨 편지 타령이지. 두 손에 든 갈색 네모 박스에 시선이 고정된다. 내방 문에 걸려있던 박스인데, 왜 들고 온 건지 궁금하다.


"내 토끼 편지함이야!"


토끼 편지함

 의아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여덟 살 큰딸은 나에게 정신 차리라는 말 대신 박스의 용도를 웃으며 알려준다. 자세히 보니 토끼 모양이다. 귀도 있고, 편지함에 글을 쓸 수 있도록 하트 편지지도 붙어 있다. 딸이 6개월 전에 만들어서 내방 문 앞에 걸어놓은 편지함이 토끼인 줄 처음 알아차린 순간다. 박스 안에는 다양한 종이들이 널브러진 상태로 들어가 있고, 그중에는 내가 큰딸 생일에 써 준 편지도 살짝 보인다. 큰딸은 2월 생이고 지금은 7월 중순이다. 내방 문을 하루에 3~4번만 여닫았다고 하더라도 500번 이상 지나친 것이다.




 최근 글쓰기가 좋다면서 아침에 3,000자를 썼다거나 하루에 3편을 퇴고했다고 아내에게 자랑하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글 모임 작가들의 긴 글과 브런치에 올라온 다양한 글을 보면서 댓글을 꼼꼼하게 달았던 나는 그렇게 사랑한다고 외쳐대는 큰딸의 토끼 편지함을 배고프게 만든 못된 사육사였다.


 '뭐하고 앉아있지!'


 대단한 작가분께서 탄생하신 것처럼 방 한편에 책상을 놓고 컴퓨터를 설치하여 하루에 2~3시간씩 글을 쓰면서 손편지 한장 안 쓴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글 쓰는 목적을 아내와 딸들에게 선물하기 위함이라고 설정한 허세로움도 결국 내 꿈을 좇기 위한 하나의 퍼포먼스쯤으로 변절 시켜 가는 시기에 나에게 경종을 울렸다.


 딸에게 얻는 게 너무 많다. 의미 없이 던진 말 한마디가 고전의 성스러운 문장보다도, 성경의 고귀한 말씀보다도 내 가슴속 깊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큰딸은 아무 생각 없이 편지가 배고팠을 뿐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나 자신이지만,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다. 이런 생각들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면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질 텐데, 글 쓰기로 하루를 정리하다 보니 그 상황의 미묘한 감정까지 남길 수 있게 되었다. 글 쓰기를 통해서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친절한 답을 하나씩 얻어간다.




비상하지 못한 종이비행기 재료


 스스로 반성하고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 소파에 누워있는데, 이번에는 거침없이 네 살 둘째가 달려온다.


"아빠, 비행기 접어주세요!"


 둘째는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존댓말을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리를 지르거나 나를 무시한다. 빨간색 색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살짝 귀찮은데, 다정한 아빠 상이니 팽개칠 수는 없고, 간단한 비행기 하나 만들어 줘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천근만근 몸뚱이를 뒤틀면서 일어났다.


"어떤 비행기를 만들어 줄까? 부엉이 비행기가 좋겠네!" 이런 말은 뇌속 어디에 있다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부엉이요! 와~~"


 종이를 대각선으로 한번 접었다. 양쪽을 다시 한번씩 접었는데, 모양이 전혀 안 잡힌다. 이상하다. 비행기를 접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접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대충 3~4번 접어서 날개를 만들었다. 양력을 이용해야 하니 날개를 더 크게 만들어야겠다는 기체역학적 접근법으로 완성했다. 내 눈에는 그럴싸했는데, 둘째 눈에는 실망이라는 글자가 투영된다. 자세히 보니 '이건 뭐야'라고 쓰여있다.


"우선 날려보자!"


 3번의 곤두박질이 끝나기도 전에 둘째는 다른 장난감으로 눈을 돌린다. 어차피 나에게 큰 기대는 안 했겠지만, 매번 비슷한 상황의 연속이다. 그 뒤로 혼자서 서너 번 더 비행기를 날리는 내 모습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첫째 상황처럼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건 아니다. 크게 날 울린 것도 없었다.


 원래, 둘째는 좀 독특하다. 자기가 해달라고하다가 매번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무시만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떠들다 간다. 그러다 뭐가 필요하면, 쪼르르 달려와 "아빠 사랑해요. 요거트 주세요!" 매번 이런 식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구시렁거리고 있을 때 베란다 창가에 비친 환하게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보였다. 그렇다. 둘째는 이상한 짓을 하면서 나에게 웃음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매번 내가 구시렁대는 것은 말 뿐이었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래서 둘째랑 티격태격 할 때마다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다 봤던 것이다. 이렇게 스쳐 지나갈 상황들을 곱씹어보니 더 큰 행복이 된다. 그렇다. 글 쓰기가 옳다.




 이래서 우리 어머니가 매일 일기를 쓰라고 했구나. 두 딸에게도 행복을 선물해 주고 싶어서 독서와 글쓰기를 시키고 싶은데, 쉽지 않다.

 당장, 큰딸 독후감 숙제를 보니 기가 차다. 콩쥐팥쥐를 읽고 '콩쥐처럼 살아야겠다'라는 한줄 명언을 썼다. 엄마한테 혼나고 울면서 나에게 오길래 "엄마가 팥쥐를 좋아해서 그래"라고 말했다가 모든 화살이 나한테로 왔다. 속상하다. 오늘은 모두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감성 손편지를 한번 써야겠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큰딸 세영과 둘째 골통... 이제 좀 내방에서 나가줄래.

퇴근 후 내방


사랑하는 세영이에게(7.15.)

삐뚤빼뚤 아빠 손편지

7.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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