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
2화 보급품(맛의 시작)
보급품[補給品 , Supplies]
(출처 : 네이버 군사용어사전)
식량, 피복, 장비, 무기, 탄약, 유류, 기타 각종 자재 및 여러 종류의 기계를 포함한 군을 장비하고 유지하며 운용하는 데 필요한 모든 품목. 관리 목적상 보급품은 10가지 종별로 구분
존의 본명은 이브라함 사바르(가명)로 레바논계 미국인이다. 현지 통역인으로 우리와 영어로 대화하고 현지 아랍어를 통역해준다. 아랍어 통역 인원도 있었고, 아랍어 전공자도 많지만, 레바논은 다양한 문화가 섞여있고 우리가 있던 남부 레바논은 지방이라 사투리가 심했다. 현지 통역인을 고용하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존은 아침마다 크로와상 여러 개를 사 왔다. 방금 구운 듯한 크로와상을 종이봉투에 담아서 출근했고, 출근과 동시에 커피 한잔을 내려 함께 곁들인다. 본인이 1~2개를 먹고 나머지는 동료에게 나눠줬다. 존에게 넙죽 받아먹은 게 내 생애 첫 크로와상이다. 일반 빵집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한배 반 정도 더 컸는데, 희한할 정도로 매번 따뜻했다. 여러층으로 나뉜 거대한 크로와상을 반으로 쪼개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바삭한 갈색 껍질 속에는 하얀 거미줄이 촘촘히 얽혀 있는 듯 속살이 보이며, 결대로 찢어지지 않겠다고 반항하지만 한쪽에서 끄집어 당기는 손에 이끌려 입 속으로 들어온다. 입에 들어오는 순간 씹을 겨를 도 없이 감탄사를 머금은 공기인지 소리인지 모를 날숨만 내쉰다. 그 후로 지금까지 크로와상을 사랑하고 매번 살짝 데워먹게 만든 즐거운 기억이다. 호텔 조식 뷔페 크로와상도 곤트란 쉐리에의 불이 나게 팔리는 빵도 그 맛을 따라올 수가 없다. 유일하게 경쟁할 수 있는 것은 방금 구워준 아내의 식빵뿐이다.
아내가 구워준 크로와
크로와상을 알기 전까지는 믹스커피만 마셨다. 잘 마시지도 않았는데, 크로와상에 어울리는 커피를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동료가 마시던 커피를 조금씩 나누다가 달지 않은 커피에 눈을 뜨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스턴트커피 알갱이를 숫자로 샐 수 있을 만큼 종이컵에 뿌려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보리차보다 연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농도는 진해졌고, 결국은 이탈리아 친구가 내어준 에스프레소와 진하다고 소문난 아랍 커피를 설탕 없이 먹어보기도 했다. 아랍 커피가 맛있거나 인상 깊었으면 기억이 생생하게 남았을 텐데,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레바논의 아랍 커피는 로스팅한 원두를 잘게 부수어서 작은 냄비에 물과 함께 넣고 국처럼 끓이거나 모카포트를 이용하여 진하게 내린다. 농도가 짙어서 에스프레소의 3배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취향에 따라 설탕을 집어넣는데, 다섯 스푼 이상을 넣는 사람도 봤다. 주로 에스프레소 잔 같은데 마시다 보니 설탕이 많이 넣어서 걸쭉하게 먹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끈적거리는 커피는 쓰고 단맛에 먹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믹스커피'와 그들의 '단쓰커피'가 겹쳐 보인다.
레바논 전역에서 술을 판매하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인접한 마을에는 없었고, 멀리 떨어진 곳에 이마트 에브리데이보다 조금 큰 마트가 하나 있었는데, 유일하게 술 코너가 있었으며, 복잡한 아랍어만 가득 쓰여 있었다.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카나가 바로 옆인데, 술이 없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그들의 문화라 내가 논할 가치는 없다. 술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주변에서 레바논 와인이 좋다는 말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성경에서 말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가까운 곳에서 포도밭을 본 적도 없고, 술도 팔지 않는 지역이라 신뢰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명한 와인 이야기는 전부 흘려버렸다.
와인을 좋아하는 동료가 한 명 있었는데, 레바논 와인은 예수님이 첫 기적을 행한 역사적인 장소이면서 전쟁 중 생산했다는 점에서 희소하고, 실제로 레바논 동부 베카계곡은 일조량이 많고 서늘한 지역으로 중동에서 유일하게 포도를 키울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질리도록 했다. 얼마나 자주 했으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귀국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동료가 레바논 와인만큼 유명한 이스라엘 와인을 한병 가져왔다. 레바논 와인은 집으로 보내고 남아있는 이스라엘 와인으로 식사 때 곁들이자는 제의였다. 이스라엘 와인도 흔하지는 않았는데, 본인이 잠시 출장을 다녀오면서 우리를 생각해서 구입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이스라엘 와인을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 하여튼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지 않은 와인을 마셔봤다. 당연히 쓰고 텁텁해서 두세 모금을 먹고 말았지만, 음식과 곁들인 페어링을 처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금은 일상이 되어 버린 빵과 커피, 와인이 내 삶에 조금씩 들어왔다. 내 운명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