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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in Oct 22. 2023

학교(의례) 없는 사회

=배움(성장) 있는 사회


교육학을 공부할 때 몇몇 눈에 띄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그 중 단연 첫째였다.



그는 학교가 필요없다고 했다. 아니 없어져야 하는 것들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났고, 그의 저서를 단행본으로 읽게 됐다.






       


        학교 없는 사회저자이반 일리치출판사월의책발매2023.02.01.




거칠게 요약하자면, 행정기관과 의례로서의 학교를 철폐하고, 배움과 성장의 네트워크(혹은 망)을 구축하자. 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우리 아이들이 매일 등교하교, 선생님들이 매시간 열과 성으로 가르치는데, 그런데도 '배움과 성장'이 없다고?



일리치는 강하게 끄덕인다.



'응 없어.'





그는 가톨릭 사제였다. 물론, 후에는 교황청과의 마찰 끝에  스스로 사제직을 버리긴 했어도, 한 개인이 가진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학교 없는 사회'에서는 학교와 교회를 서로 비교대조 하는 구절이 많다. 다음이 그 대표적인 구절이다.







87 오늘날의 학교 체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삼중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적 신화의 저장고라는 기능, 둘째는  신화의 모순을 제도화하는 기능, 셋째는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재생산하고 은폐하는 의례의 장소로서의 기능이다. 심지어 오늘날의 학교 체제, 특히 대학은 이런 신화를 비판하고 그 제도적 오용에 저향하는 기회까지 넉넉히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신화와 제도 사이의 근본적 모순을 참고 받아들이게 하는 의례 기능은 여전히 별다른 도전을 받지 않는 듯하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나 사회직 행동만으로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사회의 가장 중심에 있는 의제의 미혹에서 깨어나 그것을 떨쳐버리고 그 의례를 계획할 때만이 근본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학교없는 사회 87쪽






근대에 형성된 교육이라는 제도는 현대에 와서 어느덧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출세의 통로가 되어버렸다. 이런 측면에서, 학교는 사회적인 신화-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가면 성공한다와 같은 경구아닌 경구들-를 여럿 소유하고 있다. 또, 학교는 이러한 사회적 신화를 확대 재생산에 동참하는 기능을 하는데, 결국 이는 모순을 심화시키고, 종국에는 이런 모순을 아무도 눈치 못채는 공식화된 제도로 만들어 버린다. 한편, 이러한 괴리와 모순은 자연히 저항을 불러일으킬수밖에 없는데, 학교는 이런 비판과 저항도 기꺼이 포용한다. 그럼으로써, 모순과 괴리는 은폐되고, 은연중에 재생산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했다. 몇 년 전 <사피엔스>를 읽었을 때보다 좀 더 아팠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를 통해, 인류의 민낯을 열어 보였다면, 일리치의 <학교없는 사회>는 열어보이는 것을 넘어 학교의 뽀얀 속살을 끄집어 낸다. 



일리치는 무자비했다. 이번에 그는 학교가 기대고 있는 '성장제일 자본주의'의 속살까지 끄집어 낸다.







134 가용 시간을 쓰는 한 가지 방법은, 소비재 수요와 함께 서비스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소비재 수요를 자극한다는 말은 만들고, 소비하고, 낭비하고, 재활용할 수 있는 끊임없이 새로운 물품들의 목록을 점점 더 많이 제공하는 경제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서비스 수요를 자극한다는 말은 덕성 있는 활동마저도 '서비스' 제도의 생산물로 제작' 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시도는 학교교육을 배움과 동일시하고, 의료서비스를 건강과 동일시하며, TV 시청을 오락과 동일시하고, 속도를 효과적인 이동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이런 선택지를 오늘날에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학교없는 사회 134쪽






GDP는 현재 산업, 신용, 금융 자본주의의 'GOD'이다. 







© techdailyca, 출처 Unsplash






GDP는 발전을 나타내는 척도로서, 인간이 모든 활동을 경제적인 활동으로 간주하여 양과 숫자로 환산한다. GDP가 올라가면 우리는 발전한 것이고, 내려가면 퇴보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논리 위에서 현대사회의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소비'와 연관된다. 수요증가에 따른 생산증대만이 GDP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의 가르침도 하나의 서비스로 환원된다. 시장논리는 동일시 될 수 없는 것들을 등치시키는 데 일리치는 이를 지적한다.



학교교육과 배움



의료서비스와 건강



TV시청과 오락



속도와 효과적인 이동



학교는 의례의 공간일 뿐, 진정한 배움은 또래 간의 관계나 예술활동을 통한 우연성에 기초한다.



병원, 넷플릭스, 고속도로 등등



모두 건강, 오락, 효과적인 이동과는 거리가 먼 것들로, 때때로 우리를 위협하는 대표적인 근대의 '프래질리스타'이다.






가장 나쁜 비판은 대안없는 비판, 즉 비판을 위한 비판이다. 



그렇다면 일리치의 이런 학교비판에는 대안이 있을까?



있다.







174 이제 학교 의레의 신성한 장식물에 지출되는 돈은 모든 시민이 도시의 실생활에 더가까 이 접근하는 데 쓰여야 한다. 가령 8세에서 14세까지의 아이들을 인도적인 노동 조건 하에서 하루 1~2시간 고용하는 사람에 게는 세금감면 조치를 특별히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유대교의 성인식이나 가톨릭의 견진성사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먼저 청소년의 권리 박탈을 줄이고 결국에는 제거함으로써 12세 소년도 전적인 자기 책임 하에 지역공동체의 삶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학령기' 아이들은 사회복지사나 지역구 의원보다 이웃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게다가 아이들은 더 당혹스런 질문을 던지고 관료주의를 위협하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들에 대한 나이 제한을 풀어서 그들이 지닌 지식과 사실 발굴 능력을 공공정부의 서비스에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학교없는 사회 174쪽






띠용. 그야 말로 눈이 커지다 못해 튀어나올 해법이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특히 이 구절에서는 말이다.



'일부 '학령기' 아이들은 사회복지사나 지역구 의원보다 이웃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복지가 일이 되어버린 사회복지 공무원이나, 때때로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해야하는 지역구 의원들은 사실, 그 지역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직업인으로서 사회복지사나 선출직 의원들은 그저 자신의 '공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공무'란 이웃과 지역의 발전 그 자체이기 보다는, 할당된 업무의 해결이거나 중앙정계 진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아이들은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궁금증으로 세상을 탐구한다. 자신의 집 근처 놀 곳이란 놀 곳은 모두 다 파악하고 있는게 학령기 어린이들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어디가 위험한지, 이 위험은 언제부터였는지 말해줄 수 있다. 종종 영특한 아이는 해결책까지 신통하게 내놓기도 한다. 



일리치의 지적처럼,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을 학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나 학원에 가두고, 직업실습이란 이름으로 상식이하의 노동조건으로 견습생활을 하게 한다. 



'가령 8세에서 14세까지의 아이들을 인도적인 노동 조건 하에서 하루 1~2시간 고용하는 사람에 게는 세금감면 조치를 특별히 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급진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이 책이 저술된 50년 전의 14세는 지금의 19세쯤 될 것이다. 우리는 19세 직업계고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일리치의 주장이 급진적이지만은 않다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오히려 합리적이며, 타당하기까지 하다.






       


        다음 소희감독정주리출연김시은, 배두나개봉2023. 02. 08.









대부분의 도발적이며 급진적인 책들-나에게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이 그랬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었다-도발과 급진의 결론이나 제언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일리치의 '학교없는 사회'는 일리있는 결론을 내놓는다. 



나는 그 결론을 이 책의 시작에서 찾았다. 







60 그리스도교 신앙의 현세화는 교회에 뿌리를 둔 신자가 얼마나 그것을 위해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교육의 탈학교화도 학교에서 양육된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 학교교육만 받고 자랐다는 변명은 알리바이가 될 수 없다. 각자 할 수 있 는 일이란 게 이러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타인에 대한 경고 역할을 하는 것밖에 없을지라도, 현제의 우리 자신을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학교없는 사회 60쪽






(구)가톨릭 사제답게 그는 또 다시 비유로 말한다. 



사실, 우리에게 못된, , 나쁜 혹은 부족한 과거가 있어서 우리는 그 핑계로 어깨에 짐을 좀 덜 수 있었다. '우리 집은~'으로 시작하는 말로 나의 부족함들에 대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리치는 이런 '핑계대기'가 불가하다고 말한다. 의례화된 교육을 제공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없고, 그것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비교육적 행태를 묵인하는 알리바이도 될 수 없다고 한다. 현재의 책임은 언제나 나를 포함한 우리에게 있다.



서론부에 해당하는 부분에 제시된 이같은 일갈을 이 책의 결론으로 받아들인 것은 이 '책임'이라는 말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모두가 현재 한국사회가, 학교가, 교육이 처한 상황에 대한 알리바이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교육정책가나 행정가들은 예산탓을, 일선 교사들은 학교구조나 문화 탓을, 학부모와 대중은 언론이 탓하는 쪽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다.



나는 가톨릭 사제는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학교없는 사회'에 대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사람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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