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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a Aug 04. 2018

78화

한 계절을 건너 뛰고 한 학기 만에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난 주말은 내려올 준비를 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글쓰는 일을 잊어버리지는 않는다. 어릴 때는 뭔가를 많이 잃어버리고 잊어먹는다고 매일 잔소리를 들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깨달은 바 나는 뭔가를 잘 잃어버리는 성격이 못 된다. 게을러서 어디 가져가거나 옮기지를 않음. 잊어버리는 것도 때때로 비슷한 것 같다. 잊어버려지지 않는, 짧게 깎아 언제나 신경쓰이는 손톱처럼 여기에 글 쓰는 일을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주말에도 생각한다. 생각해도 쓰지 못하는 건 아마도 쓸 기분이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글을 쓰는 건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을 열어야 하는 것처럼 별 거 아닌데 에너지가 꽤 많이 쓰이는 일이다.


지난 두 달 정도, 시트콤 <프렌즈>를 보며 지냈다.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는데 이 기나긴 대장정의 마무리가 어떻게 될까 시작할 때부터 쭉 궁금했다. 나는 이야기의 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끝이 곧 완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면서 늘 괴로웠던 것도 끝을 만드는 일이었다. 끝은 일부러 만들지 않으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삶에는 끝이 잘 없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요즘엔 컨텐츠라는 게 대부분 끝을 알고 시작하게 된다. 내용적인 건 아니라도 16부작 드라마면 16부에 끝난다는 것을 알고, 영화를 켜면 아래에 재생 바가 나오지 않나. 그럼 대략 몇 시쯤 이 영화를 다 보고 잘 수 있는지 계산하게 된다. 나는 이런 게 싫다. 어차피 그 때 끝나는 걸 알기에, 지금의 갈등과 문제가 어떻게든 곧 해결될 거라는 이상한 희망이 싫은 것 같다. 삶은 그렇지가 않은데 왜 끝을 알고 시작해야하는건지..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게 있다. 아무런 물리적인 힌트 없이 '아, 이 이야기가 이제 끝나가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은 작품은 대부분 정말 끝이 좋았다. 이건 내가 소설을 조금 써봐서 아는데 아주 주기 어려운 느낌이다. 첫 문장 혹은 첫 시작부터 이 '끝'을 염두에 두고 시작하지 않은 이상, 청자가 이 이야기의 끝을 예감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여기서 예감은 그냥 '끝났네'가 아니라 '어, 이제 끝나려고 하는구나'의 아쉬움이 들어가는 거라서 똑똑하게 이야기의 구성과 진행상황 상 이쯤에서 마무리겠지~하는 거랑은 전혀 다르다.


<프렌즈> 역시 시즌 10이 끝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고, 알게 된 이상 나는 뒷부분의 줄거리를 어느정도 숙지하고 보는데(기대를 낮추는 거다) 끝을 예감할 수 있는 장면을 보고 기뻤다. 그 장면은 시즌 1부터 쭉 배경이 되었던 집에서 모니카가 이사를 가기로 한 장면이었다(시즌 10의 중간정도). 그 공간을 떠난다는 것. 그게 <프렌즈>의 끝이었다.


나도 얄궂긴 하지만 작은 서점을 하고 있고, 그 공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활용했던 경험이 몇 있다. 만일 그 공간을 떠나는 때가 온다면 그 때가 내 삶의 중요한 끝 중에 하나일 테지. 공간이란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내 시간이 어느틈엔가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곳. 그 공간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 땐 정말로 나에게 소중했던 많은 것들과 안녕을 말하게 될 것 같다.


내일이면 짧았던 여름휴가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간다. 거기 있을 땐 몰랐는데, 제주도에 오자마자 서울에서의 내 생활이 참 답답하고 힘들었구나 싶었다. 소중한 휴가이니 잘 쉬자고 생각하며 며칠을 보냈는데, 다는 아니지만 편안하게 잘 쉬었다. 이 끝도 아쉽지만 괜찮다고 다독거리며 잘 거다. 안녕, 내 고향.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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