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저격'이라는 말이 한때 굉장히 유행했다. '취향저격'은 줄여서 '취저'라고 쓰기도 한다. 이 말은 거의 모든 영역의 미디어에 노출 됐고, 일상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 됐다. 예를 들자면, 그 집의 꿔바로우가 취저라든가, 어젯밤에 유튜브에서 우연히 본 한 아이돌 멤버가 취저라든가 하는 식이다. 저격 당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취향에 딱 맞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너도 나도 "취저!"를 외쳤다. 취저라는 말을 조금 더 오래되고 정제된 언어로 치환하자면 '사랑에 빠졌다' 쯤이 아닐까.
내 취향'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취향'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어떨까. 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도 사랑에 빠지게 될까. 혹은 좀 지루하게 느껴질까.
나는 사랑과 신뢰를 쌓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대화가 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나 오류는 항상 오해와 갈등을 낳기 마련이니까. 자, 생각해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이 통하는 상대'는 보통 둘 중 하나다. 나와 취향(관심사)이 비슷해 공감대 형성이 잘 되거나, 혹은 나의 취향에 대한 선입견 없이 잘 존중해주거나. 결국 우리는 우리의 취향이 폄하되거나 부정 당하지 않는 관계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셈이다. 그러나, 나의 짧은 인생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타인의 취향을 제대로 또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이는 매우 드물다. 그러니, 확률적으로 나의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줄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다.
나 역시 그동안은 내가 상대방의 취향을 제대로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와 나의 연인의 취향이 완전히 다르더라도 서로 존중해주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실은 내가 '취존(취향존중)'에 퍽 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친한 친구와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상대방의 취향이 나랑 전혀 달라도 괜찮아. 예술 같은 거 관심 없다고 말해도 문제 없어"라고 아주 오만방자한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친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네가 콜드플레이나 오아시스, 데미안 라이스 같은 뮤지션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네 남자친구가 그들 중에 단 하나의 이름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네가 너무 감명 받은 책의 한 구절을 읊었는데 네 남자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는 그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하고 나를 코너에 몰아세웠다. 나는 곧바로 백기를 들었다. "아, 그런 사람은 만날 수 없어"하고.
타인의 취향을 완벽하게 존중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취존'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나와 다른 신선한 취향이 매력이 될 수도 있다. 무역업자인 한 지인은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하다 보면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분인 이병률 작가님도 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을 올리신 적이 있다. '누굴 좋아하게 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어떤 신선함에 결국 내가 움직이고 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