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재일 한국인 여성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파친코의 첫 문구다. 우연히 발견한 지역 도서관 게시판에 부착된 독서모임의 공고를 보고 이 달의 책으로 선정된 파친코를 덜컥 빌려 온 나는 몇 주에 걸쳐 500페이지 분량의 책을 꾸역꾸역 읽어냈고 약속된 날 지정된 장소로 향했다.
나를 포함한 총 9명이 참석한 북클럽 모임 멤버들은 소설의 첫 문을 여는 윗 문장의 의미에 대개 각자의 해석을 공유한다. 백발이 성성한 한 할머니는 되풀이 되는 슬픈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발 한 발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며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고 해석한다. 선한 미소가 인상적인 다른 분은 힘있는 이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역사가 씌어지지만 그 뒤에 가려진 평범한 이들의 삶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구라고 해석한다.
스토리를 파악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나는 소설의 첫 문장이 뭐였더라 하고 책을 뒤적였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문장을 충분히 음미하지 못했다니.. 나의 글읽기는 참으로 무심하구나 싶었다.
뒤이어 이어진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특정 인물의 행동에 대한 질문과 응답시간. 대부분 노년에 접어든 참석자들은 살아 온 만큼의 경험과 지혜로 각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하며 의견을 주고 받는다. 그저 재미를 위해 책을 한 번 스윽 읽고 덮어버리는 대신 이들은 저자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제대로 해석하고자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한 시간 여 진행된 독서모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각자의 삶과 무관해 보이는 머나먼 나라의 옛날 옛적 이야기에 이들이 보여 준 진지한 관심이었다. 소설의 배경과 설정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가까워야 할 내가 지금까지 재일동포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뒤늦게라도 그들의 삶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나의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인종도, 삶의 영역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참석자들은 그랬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몰랐던 것에 대해, 엄연히 존재했던 역사에 무심했던 점에 대해 독서모임 참석자들은 중간중간 아쉬움과 부끄러움을 내비쳤다.
문득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삶의 여유를 누리고 있구나 싶었다. 자신이 속한 시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인간과 더 넓은 세상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갖는 것. 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 그로 인해 확장된 사고과 인식의 폭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감흥을 타인과 나누고 공유하는 삶.
그 모습과 대조적인 나의 지난 날들이 겹쳐 보였다. 당장 필요한 정보,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내용에만 집중하며 분주하게만 살아 온 나로서는 실용적인 목적이 없는 대상에 순수한 호기심을 느끼고 집중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가물하기만 하다. 그런 삶의 방식이 오늘날 무색무취의 나로 귀결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덕분에 모르는 게 많다. 그래서 앞으로 알아갈 것들도 많다. 그 동안 안해본 일들을 하나씩 하다보면, 무심했던 것들에 관심을 주다 보면, 그래서 몰랐던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계획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움과 기쁨과 즐거움과 감흥이 선물처럼 나에게 다가올 것 같은 예감이다. 가장 좋아하고 맛있는 간식을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한 입 두 입 음미하며 즐기는 것처럼, 진정한 삶의 여유를 누리는 법을 조금씩 연습해 보려 한다.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독서토론 모임 공지를 발걸음을 멈추고 주의깊게 들여다 봤던 그 날 그 때처럼.
#라라크루 12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