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타인 1

안정과 성장, 그 다음 이야기

by 나는

얼굴에 기본 미소를 장착하고 일단 인사부터 건네고 보는 회사에서의 나날이 쌓여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슬며시 일어날 때면 내가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고, 점심시간에 혼자 밥먹기 싫을 때는 무작정 카페테리아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중인 사람들 중 제일 먼저 눈이 마주친 사람에게로 다가가 함께 앉아도 괜찮은지 물었다. 예전의 나라면 생각만 했었을 행동이었지만 이젠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냥 마음먹은 대로 돌진. 처음이 어색했을 뿐 동일한 행동이 반복될 수록 오늘은 누구와 어떻게 이어져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 지 흥미진진해 졌고,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하는 흔쾌한 예스였다. 그렇게 이전과는 정반대의 회사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유난히 탕비실과 화장실에서 자주 마주치던 다른 팀의 여자분인 P. 눈인사를 건네도 조금은 무뚝뚝하게 반응하고 별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분이었지만 모른 척 꿋꿋하게 마주칠 때마다 눈웃음과 함께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던 어느 날, 계단에서 마주친 나에게 P는 언제 한 번 같이 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이왕이면 점심을 같이 먹고 차도 함께 마시는 게 어떻겠냐고 대답했다.


바쁜 한 주가 얼추 지나가고 조금은 한갓진 느낌이 드는 어느 금요일 점심이 우리의 첫 데이트였다. 유난히 추웠던 그 날, 햇살이 잘 드는 빈 회의실에 나란히 앉아 카페테리아에서 가져 온 도시락 뚜껑을 열며 P는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다 한 달 먼저 이 회사에 들어왔지만 극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게 너무 어려웠고 자신이 다가가는 걸 상대방이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에 그 동안 참 외롭게 지내왔다고. 그런데 본인보다 한 달 늦게 입사한 내가 여러 사람들과 잘 지내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고, 어떻게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밥을 같이 먹어도 되겠냐는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꺼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의 물꼬는 토종 한국인인 내가 미국으로 이민와서 정착하기 까지의 지난 20년과, 토종 베네수엘라인인 P가 미국으로 유학와서 정착하기 까지의 지난 15년의 시간을 공유하게 만들었다. 서로의 과거를 나눈 우리는 현재 각자의 삶을 채우고 있는 취미와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보다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P가 가깝게 느껴졌고 더 알고 싶어졌다. 오후 회의 일정 때문에 서둘러 점심식사를 마쳐야 했던 우리는 각자의 회의가 끝난 뒤 다시 만나 차를 함께 마시며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헤어졌다. 출근할 때는 완벽한 타인이던 P 가 퇴근할 때는 괜시리 마음이 가는 다정한 타인이 되었다.


신기했다. 머나먼 나라에서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살던 두 사람이 이곳저곳을 돌고 돌아 오늘 여기에서 만나 일순간의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그 미미한 확률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그리고 짧은 만남에서의 대화가 겉돌지 않고 서로의 마음에 가 닿아 상대방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라라크루 글벗인 박미희 작가님께서 건네주신 오늘의 시,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에서>의 싯구가 유난히 와 닿는 날이었다. 디지털 필사를 해본다.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어쩌면 가장 소중한 인생의 친구는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소중한 친구를 기어이 만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알아보기 위한 나의 눈치없는 눈인사와 일단 하고보는 말걸기 프로젝트가 계속될 것이다. 만나야 할 사람을 안타깝게 스쳐 지나가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니.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한 편의 시, 김춘수님의 <꽃>을 디지털 필사해 본다.


<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상대방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 싶다. 그 사람이 지나 온 과거를 궁금해 하고, 그 사람의 오늘에 진심어린 관심을 가지며, 미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상대방의 이름을 정성껏 불러,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마주치게 된 이 기가 막힌 인연을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으로 만들고 싶다.


#라라크루 14기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안정과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