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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Oct 06. 2024

글을 시작하며

첫 경험은 늘 설레인다.

난생 처음 타 본 비행기, 처음 밟아 본 미국 땅, 무료한 표정으로 일상을 채워가는 미국 공항 직원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선 스무살 내 모습은 열 두 시간의 비행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무척이나 상기되었고, 그 순간순간의 기억은 이십 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다. 


대학에서 단체로 보내 준 행사이기에 십여 일의 여행일정과 숙박 교통이 다 짜여 있어 말 그대로 즐기기만 하면 되는 여행이었으니 잠자는 시간 마저 아까울 지경이었다. 스탠포드 버클리와 같은 유명 대학 교수의 강의도 듣고 캠퍼스 구경을 한 뒤 엘에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 분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처럼 유능한 분들이 미국에 많이 진출해야 한국도 더 잘 알려지고 할 텐데요.” 


그 말에 나는 ‘저는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라는 속대답을 했었더랬다. 


대가족에 둘러싸여 집순이로 자라 온 말 잘 듣는 효녀인 내게 해외살이란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족을 배신하는 일처럼 느껴졌고, 연고없는 남의 나라에서 맨 땅에 헤딩하는 일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가진 이들이나 계획하는 도피성 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 벌써 내년이면 미국에 온 지 20년이네 하고 혼잣말을 하며 우연이 점철된 인생의 묘미와 시간의 속절없음을 절감하게 될 줄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져 본 직장, 처음 생긴 회사 동료들, 무미건조한 표정을 한 직원들의 분주한 움직임과 대조되는 인턴 첫 날의 내 모습은 비록 아는 건 많지 않을 지라도 해내지 못할 일은 없다는 자세로 퍽 적극적이었고, 비슷한 시기에 나에게로 와 준 뱃속 아기와 함께 인턴 생활이자 임신기간인 9개월을 씩씩하게 헤쳐 나갔다. 


현지에서 제법 이름이 난 중형 로펌에서의 일은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었고, 엄마가 된 후에도 이런 곳에서 정직원으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바라곤 했었다. 하지만 믿을 수 있는 이의 육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미국에서 벌이도 얼마 되지 않는 인턴 레벨의 일을 유지하기 위해 엄마로서의 첫 경험을 저버릴 수 없었고, 출산과 함께 자연스레 전업주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오늘, 내 이름이 새겨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증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의 방에서 잘 보이는 벽면에 걸려 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꿈 목록에 포함된 적 없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를 수식하는 단어로 쓰이는 게 아직 낯설기만 한 나는, 그렇기에 지금의 내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러갈 수 있는 나의 미래가 낯설고 두려우면서도 흥미진진하다.


결국 인생의 세세한 계획표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나침반. 그 나침반의 동서남북이 무엇을 가리켜 왔는지를 복기해 보려 한다. 중년을 지나 노년에 다다른 미래의 내가 지금보다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정말 나다운 삶을 살아 왔구나 하며 흐뭇해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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