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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Oct 06. 2024

로스쿨 학생으로 거듭나기

Before가 처절할 수록 After가 빛난다

“엄마, 잠깐만~”


아이가 나를 잠깐 멈춰 서게 한 뒤 남편이 쓰다 물려준 와이파이만 되는 오래된 휴대폰을 들어 나의 모습을 찍었다. 출근하러 문 밖을 나서려는 나를 불러 세운터라 서둘러 찍어서인지 아니면 휴대폰 기종이 오래되어 카메라 성능이 좋지 않아서 인지 아이가 찍은 내 모습은 흐릿하게 흔들려 있었다. 


“이 사진 가지고 뭐하게?”

“엄마 보고 싶을 때 보려고.”


순간 마음에 차오르는 미안함과 서글픔에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긴 포옹과 따뜻한 뽀뽀를 건넨 뒤 출근길에 올랐던 기억이 있다.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로스쿨 수업 뒤에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스스로를 독려하기 위해 곧바로 도서관에 가서 자정까지 공부를 했던 터라 아이는 아침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엄마가 퍽 그리웠었나 보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를 마음껏 보지 못하고 견뎌야 했던 로스쿨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영어를 책으로만 배운 탓에 발음에는 진한 한국어 억양이 묻어났고,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기는 커녕 말하기와 글쓰기를 할 때마다 머릿 속으로 통역과 번역의 단계를 거치느라 답변은 남들보다 더뎠다. 


그럴때면 가장 활발하게 공부하고 사회생활을 했었을 법한 30대의 시간 대부분을 미국에서 우왕좌왕하며 그냥 흘려보낸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운좋게 재취업에는 성공했지만 9년 동안의 경력 단절은 과거 후배였던 사람을 나의 상사로 만들었고, 나보다 10년 이상 어린 학생들과 경쟁하며 체력이나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게 만들었다. 


10년만 젊었으면…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경단녀 9년의 기록이 담긴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없이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를 실천하던 해맑은 표정의 젊은 나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소중한 아이의 그림자처럼 모든 순간을 함께 했던 초보엄마인 내 모습을 보며 아쉬움을 감사함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잘했다. 잘 놀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공부할 마음도 난 것 아니겠니.’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나이들어 공부하니 좋은 점들을 찾아내 스스로를 세뇌하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해졌으니 욕심이 앞선 계획보다는 우선순위에 맞춰 내 한정된 시간을 안배하는 지혜가 길러질 테고, 암기력의 저하는 궁극적인 목표에 초점을 맞춘 효율적인 학습방법을 모색하는 동력이 될 것이며, 수업시간에 교수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더라도 그건 순간적인 체면만 좀 깎일 뿐 기말시험이나 로스쿨 서바이벌이라는 당면 과제에는 별 지장이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나의 마인드 컨트롤은 조금씩 효력을 발휘했고, 나의 문법실력은 더디지만 꾸준히 나아졌으며, 그렇게 나는 로스쿨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문법 오류가 등장하는 리포트를 제출하고 수업시간에는 꿀먹은 벙어리였던 처절했던 나의 before는 1학년 말 학점 상위 10%에 속하는 화려한 나의 after로 이어졌다.


처절했던 before는 나의 맷집을, 화려한 after는 나의 자신감을 키워주었음은 물론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궁하면 곧 통한다는데, 아직 통할 만큼 궁하진 않은가 보지” 라며 마음의 여유를 낼 수 있게 되었고, 이민자로서의 근거없는 열등감에 시달리기 보다는 “법대로 하자”는 말이 별로 두렵지 않은 조금은 건방진 로스쿨 학생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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