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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Oct 06. 2024

기말고사, 기말고사, 기말고사

나무보다 숲을, 느낌보다 실체를!

“하아….” “휴우….”


로스쿨 기말시험이 치뤄지는 조용한 강의실 안,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 나온다. 3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로스쿨 기말시험은 그 과목의 학점을 좌우하고, 로스쿨 학점이 여름방학 동안 로펌에서의 인턴 기회로 이어지며, 인턴직은 졸업 후 정규직 오퍼로 연결되기 때문에 기말고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스트레스 레벨은 상당하다. 


나름 학교에서 공부 좀 했다는 이들이 모인 로스쿨에서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는 익숙한 유형이지만, 에세이는 완전히 신세계였다. 시험문제지에는 한 장 가득 시나리오가 빽빽히 적혀 있다.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고 현실에 있을 법한 상황이 전개되다가 이들은 곧 갈등을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세이 질문: 각 인물이 상대에게 가지는 소송 청구원인에 대해 논하라.


누군가는 아직 에세이 문제도 채 다 읽지 못했고 누군가는 읽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고 누군가는 이해는 했지만 뭘 써야 하는지 막막하다. 막연하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긴 한데 뭘 어떻게 어디서부터 써야 하는지, 정확한 법조문은 무엇이었는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고 주변에서는 빠른 속도로 타이핑하며 답안지를 작성해 가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그럴수록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엔 열이 오르고 손바닥엔 땀이 차기 시작한다. 


주중에는 점심시간 포함 하루 9시간 정도를 풀타임 직장에서 보낸 뒤 저녁 4시간 정도를 파트타임 로스쿨 수업을 듣는 데 할애하고, 주말에는 다음 주 수업준비와 숙제를 하다 보면 기말고사가 어느 새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한정된 시간과 조급한 마음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업내용을 요약한 자료(아웃라인)를 반복적으로 읽고 에세이 답안지 샘플을 눈으로 훑어보며 시험을 준비했지만, 이런 방법은 내가 수업내용을 알고 있다는 느낌만 강화시켰을 뿐 실제로 에세이 답안지를 작성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무보다 숲을, 느낌보다 실체를 쫒는 방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일단 시험이 시작되면 단 3시간 만이 주어지고, 그 시간 안에 나의 타이핑 속도로 작성할 수 있는 글자 수에는 한계가 있다. 그 글자수 안에 교수가 테스트하고자 했던 이슈와 법조문을 최대한 써내려 가기 위해 나는 교수가 참고자료로 나누어 준 에세이의 샘플 답안지에서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걷어 낸 이슈 목차와 각 이슈에 대한 법구문 만을 3시간 타이핑 분량으로 추려냈다. 


그리고 무.조.건. 외웠다. 그냥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내 목소리로 녹음해서 출퇴근길에서 반복해 들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MS워드 새 문서를 열어놓고 기억나는 대로 타이핑해 보았다. 시험에서 반복적으로 테스트되는 큰 틀의 이슈 목차와 각 이슈에 해당하는 법 구문을 미리 외워두었기에 시험이 시작되면 문제에 등장하는 사실관계만 그 틀에 적용시켜 분석을 추가하였다. 그렇게 A4 용지 20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영어 답안지를 3시간 안에 작성하는 연습을 반복했고, 그 과목은 내 로스쿨 과목 중 첫 번째 A학점이 되었다.


중년의 자발적인 만학도에게도 재미는 필요했다. 너무도 시험보러 가기 싫을 때면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스스로를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학생으로 생각하며 주문(법조문)을 외워 위험(시험문제)을 무장해제시키는 똑똑한 헤르미온느인 것처럼, 시험지에 수록된 여러 문제를 이미 훌륭한 판사가 되어 내 법정에 할당된 케이스 리스트라고 상상하며 각 사례(시험문제)에 대해 최대한 공정하고 올바른 판결(정답)을 내리는 판사인 것처럼 굴었다. 그런 상상은 내가 짧은 시간 안에 풀어내야 할 시험문제를 대하는 나의 자세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꿔 주었고, 인위적으로 부여한 재미는 몰입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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