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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Oct 06. 2024

로스쿨 1학년(1L)의 기억

두려움은 무지를 먹고 자란다

“나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애.”


첫 학기 초반 하루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 밖 복도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J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와 함께 다니던 동기 서너 명은 J를 둘러싸고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J는 남들은 다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만 뒤처진 것 같다며 로스쿨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고 울먹였다. 


아이비 리그 대학의 석박사 학위 소지자이자 어린아이 둘을 둔 엄마인 J가 나와 같은 심정이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과 동지애가 생기면서 나는 J에게인지 나에게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우리 남하고 나를 비교하지 말고 그냥 과거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버전이 되어 졸업한다고 생각하자. 변호사 시험만 통과하면 되잖아”.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 마다 나는 내 주변에 앉은 십여 년 어린 동기들을 둘러보기 보다는 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려 애쎴다. 그리고 그때에 비해 영어로 씌여진 어려운 글을 비교적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성공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소방호스로 물을 마시듯 매일 읽어내야 하는 막대한 양의 소송 케이스, 수업시간에 여지없이 날아드는 교수의 까다로운 질문, 수려한 말솜씨를 가진 동기들과의 경쟁은 남과의 비교를 하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곤 했다.


“네 글에 문법적 오류가 여기저기 있지만, 나는 문법을 가르치려고 이 학교에 있는 게 아니니 거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밤새워 케이스를 조사해서 읽고 써내려 간 서면 한 구석에 씌여진 교수의 코멘트는 겨우겨우 다잡아 놓은 내 마음을 쉽게 무너뜨렸고, 항소심 변론 수업시간에 압박 질문을 받고 머리가 멍해져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 나를 향하는 교수와 동기들의 안쓰러워하는 듯한 눈빛을 느끼며 이제 정말 여기서 그만둬야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  


“에이. M이 바닥을 깔아줘야 학점에 도움이 되는데.”


선한 미소가 인상깊었던 동기 한 명이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자 그의 작문실력이 별로였던 걸 아는 다른 동기는 이기적인 아쉬움이 담긴 혼잣말을 내뱉었다. 첫 수업에 앉은 좌석이 학기 내내 고정석으로 운영되는 교실에서 한 명 두 명 사라지는 이들을 보며,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는 스스로를 장하게 생각하다가도 혹시 실패할 게 뻔한 투자를 손절할 용기가 없는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인간은 적응한다. 교실을 오가며 익숙한 얼굴들과 수줍게 미소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고단하고 외로웠던 로스쿨 생활의 단비같은 소중한 인연을 하나 둘 만들 수 있었다. 한국말이 통하는 두 명의 동기는 수업이 끝나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으며 하소연과 격려를 주고받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친정 아버지 장례식으로 수업을 일주일 빠져야 했던 나를 화장실에서 만나 안부를 묻던 I는 자신도 중학교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던 터라 내 맘을 이해한다며 따뜻한 포옹으로 위로해 주었으며, 너무 고차원적으로 진행되던 헌법학 수업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나에게 C는 자신의 수업자료를 건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컴컴한 물 속에 발을 담그는 것처럼 막막한 두려움이 가득했던 나의 1L 시절은 잠 만큼이나 부족했던 자신감을 놓치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던 시간이었고, 바쁠 때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와 망중한의 달콤함을 확실히 알게 해 준 기회였으며, 공감할 수 있는 타인의 소중함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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