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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길

장미의 완벽한 하루

by 백안





대사회 커밍아웃대회




AM 06:20 기상.



예전이라면 두 번째 알람을 듣고도 한창 귀찮아하던 장미였지만, 오늘만큼을 벌떡 일어나 거울로 향한다.

새집지은 머리에 비니를 눌러쓰고 후다닥 출근하기 전 헬스장으로 향한다.





장미는 곧 있을 '대사회 커밍아웃대회'에 참가해 입상을 노리고 있다.



이번 커밍아웃대회의 심사기준은 '쇼킹함'이었다.
참가자들은 그곳에 모인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음료를 마시는 동안, 그들의 퍼포먼스 or퍼포먼스가 담긴 영상을 통해 동공이 커지게 하거나, 사레에 들리게 하는 것이 그 심사기준이었다.

참가자들에게는 모두 벤티사이즈 크기의 음료가 제공되고, 앞에 있는 카메라의 '얼굴인식기'를 통해서 그들의 동공은 정밀하게 추적된다. 음료는 편파적이지 않게 참가자 한 사람당 세 모금씩 공평하게 마실 수 있었고, 혹시나 몰래 응원하기 위해 네 모금을 마신다거나 덜 마신다거나 하는 경우 가차 없이 참가자가 실격되어 버리는 엄숙한 대회였다.

퍼포먼스는 자유지만, 가장 사회적 상식과 어긋나는 비주얼과 태도가 그 기준이었다.
또, 자신만의 용기와 당당함으로 '사회적 혼란 및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대전제는 늘 깔려있었다.

참고로 지난번 심사에서는 생방송을 보던 도중 300명이나 밥을 먹다가 사레에 들렸고, 90여 명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1 시간 넘게 딸꾹질에 시달렸을 정도였다고 하니, 대회의 참가자들의 수준은 두말할 필요 없이 탁월한 수준이다.





'대사회 커밍아웃대회'에 입상을 하기 위해서, 장미는 외모는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최고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올라야 했다. 스스로 늘 이 시대 최고의 광인이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장미이지만, 대회가 다가올수록 그 떨리는 마음은 여지없다.



지난번 대회에서 우승했던 '드랙맘'이 이번에도 출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녀의 등장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대회에서 선보였던 치명적인 의상과 독특한 메이크업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녀의 메이크업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눈을 감았는데도 마치 뜬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동시에 감은 것처럼 착시를 일으키는 신비로운 기술은 보는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치 깃털처럼 위아래로 움직이는 속눈썹은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살아있는 퍼포먼스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비주얼 못지않게 충격적이었던 건 그녀의 직업이었다.



화려한 그녀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로, '국립묘지 비석 관리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풍스럽고 우아한 그녀의 이미지가, 흔히 알고 있는 묘지관리인의 이미지와는 너무 달랐고, 고요하고 경건한 묘지의 분위기와도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2미터에 이르는 화려한 롱드레스를 입고, 두께 5센티미터에 달하는 속눈썹을 한 채 묘비를 닦고 꽃다발을 정리하는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묘지 곳곳을 돌며 정성스레 비석을 닦고,


“이 꽃은 여기가 더 잘 어울리겠네?”


라며 섬세하게 꽃꽂이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경외감마저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화려함은 묘지의 무거운 분위기를 걷어내고 생기를 불어넣었다.

국립묘지는 마치 테마파크처럼 밝고 찬란한 공간으로 재탄생했고, 방문자들은 슬픔을 잠시 내려놓고 그녀의 작업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드랙맘은 추모의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빛내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드랙퀸으로서의 화려함과 국립묘지 관리인으로서의 진중함을 모두 갖춘 그녀는 사람들에게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기며, 이번 대회에서도 화제의 중심에 설 준비를 마쳤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 196cm의 신장에 이르는 그녀는, 다이빙 선수권 대회에서 입상까지 했다고 한다. 게다가 새로 조성된 국립묘지 중앙의 대형 수족관에서 자신의 대회 출전 영상을 배경으로, 다이빙 퍼포먼스를 선보일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장미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두가 한 개성 하는 각양각색한 퀴어/성소수들이 출전할 예정인데, 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누구보다도 말도 안 되는 미친개성과, 깡을 보여줘야 한다고.

그러면서도 모두를 아우르는 엄청난 아우라를 가진 아름다운 존재로 보여야 한다고 믿었다.

먼저 포토제닉 한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얼굴의 부기를 최대한 빼야 했다.

장미도 물론 한 개성 하는 외모인 데다, 공무원증을 목에 걸고 광화문거리만 돌아다녀도,


".. 헉!!!"


소리가 들을 만큼 퀴어 퍼레이드를 자연스러운 라이프스타일로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었고,

'성소수자, 내부고발자 공무원.'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니, 저런 사람은 상 줘야지!"


라는 소리가 나올 법 한 조합이지만, 장미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어떻게든 더 강한 개성을 끌어내어


"저런 사람이 공무원이라고??!" 라며 대사회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번에 참가했던 '드랙맘'을 생각하면, 아직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고 이내 푹 숙여진다.

그녀에 비하면 스스로의 개성이 한참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새벽 헬스장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먼저 장미의 목표는 신문사를 통해 포토제닉한 사진을 얻는 것이었다. 많은 지면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라서, 단 두장의 사진으로 승부를 볼 예정이었는데, '확신의 슬리데린 상'이면서도 '그리핀도르'가 동시에 떠오르는 사진으로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작품의 주제는 선과악의 판단을 하기가 모호한 인상과 젠더와 상관없으면서도, 아름답고 멋진 존재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난 1년간 끊임없이 대회 준비를 위해 자신의 매력을 갈고닦길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합을 외치며, 장미는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춤이 시작되는 순간



“두. 둥. 탁. 탁.”


이어폰을 통해 장미의 귓가에 익숙하면서도 신나는 리듬이 흘러들어왔다. 지난번 아이의 수업에서 들었던 힙합 음악이었다.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장미의 머릿속에 새로 배운 안무가 눈앞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한 번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그날 이후로 춤은 그녀의 몸과 마음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았다.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장미에게는 거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대가 되었다.

근무 중 엘리베이터의 좁은 공간에서도, 출근길 건물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이며 리듬을 탔다.

처음엔 서툴러서 손발이 엉키기 일쑤였지만, 요즘의 장미는 달랐다. 손과 발이 점점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리듬에 몸을 맞추는 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어느새 음악이 흐르면, 그녀의 몸은 그것에 반응하듯 흥겹게 움직였다.


장미는 아이를 떠올린다. 아이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겹쳐져 장미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도 어느샌가 자신감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자신감 있는 표정은 어느샌가 어깨, 가슴, 팔, 몸통 쪽으로 옮겨 붙었다.

입가의 미소와 이어져 자연스레 몸으로 이어지며 살짝 흔들리는 듯 한 장미의 동작은, 마치 작은 파도가 일렁이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 장미는 춤을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춤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좋아! 큰 춤 한번 추고 와야겠어!”



그녀의 눈동자 안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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