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잃어버렸던 불을 밝히다.
빛나는 연습실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잠시 응시하며, 하나로 올려 묶을 머리카락의 이마를 쓱 닦는다. 거칠어진 호흡과 손끝에 묻어나는 축축한 땀이 그녀의 열정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춤은 늘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어릴 적 우연히 다니게 된 발레학원을 계기로 춤을 좋아하게 되었고, 예중,예고에 이어 전공으로까지 무용을 전공했던 그녀는, 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무용수가 되고 싶다는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늘 춤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고, 세상과 소통했다. 그러나 그 시절 세상은 그녀가 표현하고 싶은 춤이 아니라, 정답을 찍어내는 것처럼 춤을 배우기를 강요했다. 자기표현을 하기보다는 맞춰주는게 익숙한 그녀는, 부탁을 받으면 거절을 잘 하지 못했던 성격이었다. 어느새부턴가 당연히 항상 어려운 테크닉이 들어간 동작은 그녀의 몫이 되어버렸고, 고난이도의 동작을 하다가 부상을 입었어도 교수님과 선배들은 그녀를 걱정하기 보다는 그녀를 탓하기 바빴다. 무거운 질책과 비난.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압박감이 항상 그녀를 짓눌렀고, 결국 그녀는 춤을 그만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7년이 지난 지금,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퇴근 후 소파에 늘어져 무심히 휴대전화를 스크롤하던 중, 소셜 미디어에서 한 댄스스튜디오 광고 영상을 발견했다. 화면 속에는 밝은 조명 아래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댄서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긴 머리를 위로 질끈 묶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유난히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바로 아이였다.
"우리 모두가 춤을 통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자, 당신도. 함께하지 않겠어요?"
화면 속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빛나는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가슴 속 깊은 곳의 열망이 서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문득 그녀는 아이를 처음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이를 본 적이 있었다. 아이는 한 인터뷰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었다.
"저는 춤을 너무 사랑했어요. 제 삶의 전부였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은 한때 저의 춤에 혹평을 쏟아내었어요. 그 비난은 저에게만 그치지 않고, 제가 가르친 제자들에게까지 쏟아졌습니다. 그때 저는 제 존재가 춤 세계에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이제 제가 춤에게 자유를 주었답니다. 저는 이제 제 자신과, 제 춤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춤을 추죠."
그 인터뷰는 빛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의 아이는 자신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길을 찾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제, 아이가 자신을 데리고 새로운 길로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망설였다. 직장과 집이라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과거의 꿈을 다시 꺼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결국 그녀는 화면에 뜬 신청 링크를 클릭했다.
".. 일단 시작해볼까?"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일단 시작해 보기로. 춤을 다시 시작하면 오래 묵혀둔 상처를 다시 꺼내게 될까봐 두려웠지만, 일단 그 첫걸음을 내딛어 보기로. 밑바닥에 꾹꾹 누르고 감춘 채 살아오면서 억압해 두었던 춤에대한 빛나의 강렬한 열정은 더이상 피할 수 없이 빛나의 얼굴을 마주보았고, 그녀는 더이상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수업 첫날. 빛나는 조용히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널찍한 거울과 나무 바닥이 펼쳐진 그곳에서, 아이가 따뜻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군요!!! 저는 아이입니다. 아유~ 긴장하지 마세요! 즐겁게 춤추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요."
아이의 밝고 다정한 목소리에 빛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 순간, 그녀는 이곳이 자신이 다시 춤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임을 직감했다. 아이 역시도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많은 아픔을 이겨내 온 사람이였고, 결국 그 아픔을 치유해 온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된 춤을 통해서 아픔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녀에게 더욱 큰 위로가 되었다.
"여기라면 가능할 것 같아.."
빛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이는 그녀의 말을 들은 듯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소는 마치 빛나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아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듯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무언의 약속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이와 빛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을 때, 그들 사이에는 따뜻한 신뢰가 싹트고 있었다. 춤의 열정으로 가득한 스튜디오 안에서, 두 사람의 눈빛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을 응원하듯,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유난히 눈부시게 반짝였다. 스튜디오의 공기는 이미 춤을 추기 전부터 따뜻해 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