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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과 아이의 이야기.

아이의 기억

by 백안




아이는 처음 수연을 만났을 때, 그녀가 마치 오래된 영화를 보는 기분을 들게 했다는 걸 기억해 낸다. 그녀의 몸짓, 숨결, 그리고 춤. 그것은 아이가 알던 춤의 언어와는 조금 달랐다. 수연은 분명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춤에는 시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있었다.



수연은 내가 지도했던 제자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그녀가 가진 열정이 단순히 춤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선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를 절실히 갈망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그 간절함은 언제나 나를 흔들었다.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그중에는 중간에 꿈을 접은 친구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달랐다. 그녀의 춤은 처음엔 다소 거칠고 미숙했지만, 점점 그녀만의 이야기를 담아가는 과정을 보며 나는 점점 감동을 받았다.


수연의 몸은 너무 작고 마른편이었다.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동작들 속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종종 묻힐 때가 많았다. 스스로 한계를 느끼는 수연은 종종 아이를 찾아와 고민을 상담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곤 했다.



"수연아, 춤은 너를 드러내는 거야. 네 몸이 가진 약점도 너만의 이야기가 될 수 있어. 그리고, 결국 춤은 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보여주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녀가 내 말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팝핑배틀에서 자신보다 한참 전에 춤을 시작한 후배에게 입상을 양보하게 된 수연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아이를 찾아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제 춤이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팝핑에서 기대하는 건 강렬함인데, 저는 그걸 채울 수 없어요.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처음에는 제 춤을 보면서 환호했지만, 이제는 점점 더 반응이 없어지는 것 같다고 느껴져요. 저는 그럴 때마다 자신감을 잃게 되고 춤을 계속할 수 있을지..라는 고민까지 들어요.."



나는 수연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었다. 지금 수연에게 하는 한 마디가, 그녀가 앞으로 걸어갈 댄서로서의 길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이는 오랜 경험 끝에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수연아.. 춤은 강렬함이 전부가 아니야. 네 춤이 가진 특별함은 다른 댄서들로부터 찾을 수 없는 거야. 너는 너 자신을 보고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해. 그게 결국 네가 가야 할 길이니까. 지금 네가 약하다고 느끼는 그 점은 오히려 나중에 너를 특별하게 만들 수 있어. 네가 지금 고민하는 그 감정마저도 소중히 하렴. 네가 스스로 춤을 포기하지 않는 한, 너의 길은 계속 있어.. 그 길을 이어가는 게 너의 이야기이고, 너의 춤이 되는 거야.. 네가 포기하는 순간. 춤은 그때 끝나는 거야.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니라."








댄서이자 안무가로서도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싶었던 수연은 끊임없이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나만의 춤이란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단순히 어울려 피는 꽃이 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댄서들 속에서 흔히 보이는 하나의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았다. 독보적인 꽃으로 피어나야만 했다. 그래야 다른 꽃들에 묻히지 않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엄격한 댄서계의 심사 기준이란, 독창적인 존재감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수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맞는 춤의 언어를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도전했다. 그녀의 마르고 섬세한 몸은 팝핑의 강렬한 에너지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 대신 그녀만의 장점을 살리기로 했다. 팝핑 특유의 힘 있는 움직임 대신, 곡선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춤을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흐르듯 유려한 선 위에 이따금씩만 힘을 주는 춤은 마치 잔잔한 물결 속에서 단단한 돌을 발견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녀에게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점은 춤에 감정을 담아내는 일이었다.


"아이 선생님 말씀대로, 내 춤이 나를 표현하는 거라면.. 이 안에는 어떤 감정을 담아야 할까..?"


수연은 프리스타일 배틀 무대에서 자유롭게 춤을 추는 데 익숙했다. 그곳에서는 단순히 기술로 상대를 이기면 되었고, 춤의 감정선이 강하게 요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 안무는 전혀 달랐다. 춤 그 자체보다는 카메라를 향해 매력을 발산하고, 관객을 유혹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는 부족했다. 춤은 몸뿐만 아니라, 표정으로도 제스처로도 많은 것들을 담아내야 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내 춤에 감정을 녹여내려면, 내가 먼저 나의 감정을 제대로 알아야 해."


수연은 연극 무대에 섰다. 배우들이 어떻게 표정을 통해 캐릭터를 만들어내는지 관찰하고, 직접 연기에 도전했다. 그들의 눈빛 하나, 입술의 미세한 떨림까지도 캐치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그걸 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적용하려 노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그런 노력들은 점점 몸의 언어로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춤은 몸의 움직임이지만, 그 움직임에 이야기가 없다면 관객은 내 춤을 느끼지 못할 거야."


그녀는 또한 카메라를 배웠다. 카메라가 어떤 순간에 감정을 잡아내는지, 화면 속에 담기는 움직임이 실제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 춤은 단순한 움직임에서 연기와 이야기가 결합된 퍼포먼스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춤의 매 순간이 하나의 감정적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수연은 늘 안무를 창작하기 전, 거울 앞에 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왜 춤을 추고 있는 걸까? 내가 무대 위에서 말하고 싶은 건 뭘까..?"


그녀는 자신이 추는 모든 동작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표정은 과장되었고, 동작은 의도한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실에 남아 춤을 반복하며 자신의 약점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이를 극복할 방법을 고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춤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움직임은 단순히 곡선적인 아름다움을 넘어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춤의 기술은 여전히 복잡하고 어려웠고, 배틀댄서로서 몸에 밴 습관들이 안무를 소화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술과 감정을 점차 하나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법을 배워갔다.



"그래.. 춤은 몸으로 하는 언어표현이구나..! 춤이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보여준다는 아이선생님의 말도 이제는 알 것 같아. 춤은 점이 아니라 선이었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해!"


"나는 독보적인 꽃으로 피어나고 있어.. 춤으로 나를 표현하고, 그걸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할 거야."



수연의 춤은 그녀의 진심을 담은 이야기가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묻히지 않았다. 그녀가 피어난 무대는 그녀만의 꽃밭이었고,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춤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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