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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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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Oct 15. 2020

24. 너와 함께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아.

아이의 시선으로 본 마법같은 일상

아이는 당신이 모든 것을 더 깊이 인식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아이는 당신이 아이가 없었다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들, 즉 아름다움, 뉘앙스, 사람들 사이의 미묘함, 인생에 대한 질문들을 소개해줄 것이다.

<까다롭고 예민한 내 아이, 어떻게 키울까?> p.110 - 일레인 N.아론




저녁에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거실에서 놀던 하레가 갑자기 "이거빠여!!!(이것 봐요)"하고 달려오더니, 내 손을 잡고 거실 창문으로 데려간다.

그곳엔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빛나는 커다랗고 동그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하레는 그렇게 크고 동그란 달을 처음 봐서인지 신기한듯 오래도록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이렇게 눈이 부실 정도로 커다란 보름달을 본 게 얼마만인가. 

아니, 밤하늘을 올려다 본 것 자체가 얼마만인가 싶어 나도 하레와 함께 나란히 앉아 가만히 보름달을 구경했다.




"어린 시절의 네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을 건넨다면 뭐라고 하겠니?"
"모르겠어요."
"생각해봐. 어떤 말을 듣고 싶어?"
난 엄마와 다르다는 말이요.
"언젠가는 끝날 날이 온다고요."

<긋 미 배드 미 Good me bad me> p.189 - 알리 랜드


나는 출산 예정일이 일주일이 지나도록 바깥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아서 긴급 제왕절개 수술로 꺼내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어쩌면 이 세상에 나올 엄두가 안났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말살당했다.


20대 초반에 썼던 다이어리에는 "나는 세상에 나와 걸어 다니는 엄마의 내장이다."라는 한 줄이 적혀 있다.

단 한 번도 내 의견, 감정, 생각을 존중받기는 커녕 가질 엄두도 못냈고, 그래도 되는 건지도 몰랐다.

엄마의 쌍둥이처럼 흡수되어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자랐다.

게다가 우리가족은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믿었기에 일상을 살기는커녕 미래도 없이 늘 언제 닥칠지 모를 두려움과 재난만 대비하며 살았다.


우리엄마는 경계선 성격장애를 앓고 있다.

성격장애자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매우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자신의 광기를 타인에게 떠넘겨 주변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 뿐이다.

게다가 이들은 자신을 보살펴주고,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고, 부정적 감정들을 대신 떠맡아 주고, 세상을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만들어줄 '보호자'를 필요로 한다. 

나는 엄마의 보호자였다.


엄마로부터 떠넘겨진 온갖 정신병적 요소를 다 가진채 여차하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살았다.

자아관, 세계관이 기묘하게 일그러진 세상 속에서 자란 나는 마치 성격장애자들을 위해 섬세하게 맞춤 제작된 '호구'같았다.

공감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에게만 공감하고,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배척하고.

그래서 한평생 어디를 가든 내 주변은 성격장애자들로 들끓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세계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하레엄마가 나타나서 그런 병적인 내 세계를 깨주기 전에는.


몹쓸 저주에서 풀려난 기분이 들었다.




생각이나 원하는 것, 욕구 등을 지나치게 오랜 시간 묻어두다 보면,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고, 느끼는지 모르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견을 묻어두면 묻어둘수록, 성격장애자들과 더 잘 어울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아무런 생각이나 욕구도 지니지 않으면, 어떠한 갈등도 일으키지 않으리라 믿는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당하지 않고 살것인가> - 마르갈리스 프옐스테드


나의 인간관계에 '엄마'가 끼어있으면 그게 누구든지 엄마의 이간질로 관계가 왜곡되고 틀어졌다.

하지만 엄마가 나에게 한 가장 큰 용서받지 못할 이간질은 바로 '나와 나 자신'을 이간질 시킨 것, 그리고 '나와 신/세계'와의 관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엄마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

엄마도 나에게 '줘야할 것'을 받아보지 못한 또 한 명의 불쌍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는 이해하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본연의 내가 어떤 모습인지 모르고, 심지어 부모로부터도 단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받아 보지 못한 나는 가끔 나 자신이 버거울 때가 있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들 하던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무슨수로 사랑하지? 싶다.


호흡이 너무 얕아요.

언젠가 긴장으로 너무 어깨가 뭉치고 아파서 찾아갔던 맛사지샵에서 맛사지를 해주시던 분이 말했다.


나는 33살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제대로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숨을 깊게 들이 마쉬고 내쉬어도 되는거였구나.

눈물이 터져 나오고 손바닥과 가슴 중앙에서 에너지의 소용돌이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해서 이러다가 진짜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나는 불안이 익숙하고 편안함이 낯설고 두렵다.




애늙은이로 살아야 했던 나에게 유년기란 그저 '더럽고 치사한' 거였다.

엄마는 "나는 거짓말 하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해."라고 했지만, 사실을 말해도 어차피 혼난다.

뭘해도 혼난다. 엄마는 그냥 화를 내고 싶은거니까.

그러니 엄마보다 늘 한,두 수 앞서 생각하고 엄마의 반응을 예측하며 발작을 일으키지 않을만한 '정교한 거짓말의 거짓말'을 하는데 매우 능숙했다.

어린이가 순수하다고? 개뿔.


어른이 되서는 내맘대로 돈을 벌어서 쓸 수 있으니, 고된 삶이지만 어린시절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모래성을 쌓다가 파도가 와서 휩쓸어가도 개의치 않는 '아이같은 마음'으로 살아라.

그런 마음이 도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사춘기'가 뭔지, 어떤 건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를 그냥 훌쩍 건너뛴 것 같기도 하고, 평생이 사춘기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행복해져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마치 한데섞인 소금과 설탕을 따로 분리해내는 것같은 느낌이지만, 나에게서 '엄마'를 분리해내고 있다.

이 끝도 없어 보이는 작업에 지치다가도, 어쩌다 찾아내는 '나'라는 조각을 발견하는 기쁨은 그 무엇에 비할 수 없을만큼 매우 크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신뢰'와 '천진난만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 자신, 사람, 사회, 인생, 세계에 대한 낙관.

'다 잘될거야.'가 아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잘 헤쳐 나갈거야.'라는 마음.


그런데 '하레'가 내 인생에 들어와 나에게 그 소중한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인생을 갓 시작한 아이의 눈으로 함께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마법같은 일상을,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점점 회복했다.





아침 6시.

거실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안방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하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온다.

파인애플모양으로 뻗은 머리를 하고 뽕긋한 배와 불룩한 기저귀를 차고 뒤뚱거리면서.

배시시 웃으면서 장난꾸러기같은 얼굴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런 하레도 기침과 토, "아빠~~!"하는 불안한 외침과 눈물로 하루를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너무 일찍 일어나려고 해서 '햇님이 뜰때까지 코자야'한다고 하면, "고모, 햇님이야?"하고 누워서 눈만 감고는 계속 물어본다.

더 잘 것 같지도 않아서 "일어나서 놀아."라고 하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간다.

하루를 어서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루를 저런 마음으로 시작해야 하는구나.

인생을 저렇게 즐겁게 살아야 하는구나.

슬플 땐 하레처럼 진심으로 울고, 화가 날 때도 진심으로 화를 내야하는 거구나.

아이를 보며 배웠다.


약국이나 마트에서 아이가 자꾸 손을 놓고 사라져서 보면 그 자리엔 사탕, 젤리, 초콜릿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른의 무릎에서 허리 높이에 '아이들의 시선'이 닿는 곳엔 전혀 있는 줄도 몰랐던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감흥없이 지나치던 아파트 화단도 새로운 눈으로 보니, 신비로운 생태계였다.

하레는 유모차에 앉아 있다가, 잠자리를 보자마자 "빼!(내려줘)"했다.

잡으려다가 계속 놓친 하레가 "잠자리, 어디갔지?"하자, 어디선가 잠자리 한 마리가 하레의 머리 위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다가 패딩 조끼 위에 잠시 앉았다가 날아갔다.

마치 하레에게 '친구'가 되어주려고 온 것 같은 마법같은 순간이었는데, 하레도 놀라고, 좋고, 기쁘고, 신기했는데 그 느낌을 표현할 어휘가 부족해서 "이상해."하고는 웃었다.

그리고는 집에 오는 내내 몇 번이고 잠자리가 자기 옷에 앉았다고 자랑했다.


화단에 들어가서 작고 빨간 열매를 따면서 '딸기'라고 했다.

사실 나도 뭔지 잘 몰라서 '다람쥐 맘마'라고 하고는 "다람쥐가 와서 먹어야 하는데, 하레가 너무 많이 따면 '어? 너무 배고파 엉엉'한다!"고 하자, 하레는 미안하고 놀란 표정으로 따기를 멈춘다.

집을 향해 한참을 걸어 가다가 "다람쥐, 배 아파."라고 말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배아프니까 자기가 조금 딴 건 괜찮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이 작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벌써부터 다람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자라나고 있다니, 놀랍다.


전엔 하레를 돌보는 시간동안 '무언가 특별한 놀이를 해줘야 한다'는 강박때문에 무리를 하곤 했다.

언제부턴가 '아. 우린 가족이구나. 생활이구나. 일상이야.'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길게, 매일보는 가족이라면 일단 편안해야 하는거구나.

그래서 하레에게 재미있는 자극을 하루에 한 개 이상 주려고 노력하되, 하레가 흥미를 보이는 일을 가지고 편안하게 같이 놀기 시작했다.


어느날은 감자나 만두를 삶을 때 쓰는 스테인레스 찜기를 가지고 둘이서 한참을 놀았다.

무언가를 '삶을 때 쓰는거'라는 어른의 시선이 아닌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것은 정말로 놀라운 물건이었다.

스테인레스로 된 꽃, 혹은 로보트같기도 하고.

오무려졌다, 펴졌다 하는 모양이 매혹적이었다.

이렇게 하레와 함께하면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특별하게 변했다.

쑥쑥자라는 하레의 귀여운 유아기도 금새 사라질거란 생각이 들면 매 순간을 기를 쓰고 붙잡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 귀여움을 하나라도 더 눈에 담고 싶고, 한껏 누리고 싶어서.


세상이라는 곳에 갓 태어나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아이.

어쩌면 하레는 나에게 함께 '새롭게 태어날 기회'를 주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활짝 피어나는 아이를 나의 병든 세계로 짓밟을 것인지, 아니면 아이와 함께 다시 태어날 기회를 얻을 것인지, 그것만은 무섭도록 분명하게 내 손에 달려있었다.




수검자가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주로 경험하였던 느낌은 "엄마에 의해 집어삼켜질 것 같은" 두려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현재는 어머니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기대되거나 부여받은 정체성이 아닌 스스로에게만 귀속될 수 있는 고유성을 만들고 유지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더불어 경계를 넘는다고 느껴지는 어머니와 지내는 과정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구가 커지게 된 것 같은데, 그 결과 전반적인 대인관계에 대해서도 과도한 경계 상태에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 2019년 8월 심리평가 보고서


아파트 후문 근처에 있는 모래 놀이터에는 150cm 정도의 높이에 철봉으로 고정된 원반 모양의 공중 징검다리가 있다.

예전엔 내가 손을 잡아주면 잘 건너가던 하레는 이제 '높이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내가 건너갈 수 있어!"하고 허세를 부리더니, 막상 올라가보니 발을 떼기가 무서운 모양이다.


"코모~~~!!"하고 절규하듯 부르길래 섣불리 내리려다가 내가 다칠 수도 있으니, 하레더러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앉아서 뒤로 누우면 고모가 안아서 내려줄께!"

공중에 떠서 서있다가 앉는 것도 무서운데, 이번엔 '손을 놓고 뒤로 누우라'고 하자 하레는 심장을 쿵덕쿵덕거리며 철봉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렸다.

결국 하레의 앞쪽으로 가서 고모에게 안기듯 뛰어 내리라고 고모가 잡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아이를 내려주었다.


이 일이 어쩐지 나 자신, 세상, 관계에 대한 여전한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은유인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도 미숙함이다.

다만 나는 이제 나는 어른이니까 두려움이 느껴질때, 마비되지 말고 차분히 어떻게 헤쳐 나가야할지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두렵다.

하지만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 내 안의 잘못된 믿음과 생각들을 알아 차리고 이제는 놓아주어야만 한다.

이제는 나를 잡아줄 사람들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굳게 붙든 손을 떼어내야 한다. 




애도하라.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린 시절에 놓친 무언가를 이제 와서 찾을 수도 없고, 불안정성이 초래한 상처들로 온전한 삶을 살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애도해야 한다. 


이 애도는 '잊어버리고 성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평생 애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기 위함이다. 

과거도 모두 당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들려주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임을 나중에 배우겠지만 말이다. 

흥미롭게도 후천적 안정형은 안정형과 달리 수술 후 남은 흉터처럼 슬픔의 잔재를 안고 있다.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의 사랑> p181 - 일레인 N.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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