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6 22:18
이번 여행은 패키지 관광을 선택한 덕에 프랑크푸르트행 직항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젊은이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역시 여행은 자유여행이지-여행 두 달 전부터 본격 검색에 나섰지만, 손 빠른 사람들이 항공권을 모두 선점한 모양이었다.
웬만한 경유 편 항공권조차 패키지 상품의 2/3 정도 가격이라 숙소와 항공권을 빠르게 해결하고 싶다면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그럼에도 열두 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상대적으로 편한 국적기임에도 허리와 엉덩이가 아프다.
메모하는 지금도 엉덩이 아래에 쿠션을 깔고 앉았을 정도.
작년 신혼여행 때는 어떻게 괜찮았던 건지 모르겠는데 이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연세 든 어르신들은 오랜 비행이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내 프로그램에 내장된 영화와 게임 몇몇을 건드려 보다 결국은 고집스레 챙겨 간 이북리더기를 사용했다.
목베개도,
비행용 음압유지 귀마개도,
공항 라운지 입장에 필요한 카드 전월 실적 30만 원도 못 챙겼으나 이북리더는 잘 챙겼다.
(귀마개를 뺀 두 가지는 공항에서 돈으로 해결했다)
멀어져 가는 그 옛날 누군가가 노래했지, Video kill the radio star이라던가?
나는 video kill the writing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글 읽기가 필수가 아닌 기호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요즘은 책의 최대 적수가 유튜브와 넷플릭스라는 말이 맞다.
독서량을 늘려야 해!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폰을 안(못)해야 책 읽을 생각까지 미치는 것이다.
한때 새롭게 거듭나고 싶어 많이 읽었던 자기 계발류의 서적이 모두 물린다.
조던 피터슨 책이 너무 안 읽혀서 이제 뼈 때리는 조언 같은 게 나한테 잘 안 먹힌다는 걸 알았다.
한편으로 긴 글 자체를 못 읽게 된 건가? 약간은 불안했는데
오랜만에 집어든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소설로 깔끔하게 걱정 해결-재미있는 내용이 아니라 안 읽히는 것이었다.
이번 비행은 김사과의 맛에 빠져 보는 시간이다.
너무.. 힙해서 나 같은 사람이 읽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힙한 소설이었으나 어쨌든 너무나 술술 읽었다.
아무도 동의 안 하겠으나 혼자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 영화 <오펜하이머> - 김사과의 소설
을 큰 대분류 속에 함께 넣어 두고 있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1920년대 서구권 문화계의 유명인사,
오펜하이머는 2차 세계대전 즈음을 풍미했던 과학계의 천재들,
김사과의 소설은 영미서구권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문화, 음악이 이스터 에그처럼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
스쳐가는 인물을 몰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큰 불편은 없으나-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지인 무리를 보는 것처럼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약간의 안면이 있다면 반가움과 함께 갑자기 이야기 속으로 쑥 들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를 내적으로 외치며 보아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기내에서 고른 영화는 안야 테일러 조이의 <엠마>였다,
제인오스틴!
안야 테일러 조이가 이제 넥스트 잉글리시 로즈가 될 것인가?
한때 키이라 나이틀리가 시대극 쓸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한 영화 <오만과 편견>도 재미있었다. 새로운 다아시가 옛 콜린 퍼스에 비해 좀 그랬지만.
영국에서 만든 시대극+로맨틱코미디 조합이 좋다.
프랑스 식 화려한 의상이나 고증을 철저히 거친 화려한 장신구들도 좋지만-
영국 시대극은 복식도 그렇고 묘사하는 생활상도 그렇고, 심심한 듯 칼칼한 콩나물국 같은 매력이 있다.
너무 잔잔해서 재미없나? 싶은데 보다 보면 시간 잘 가고 은은한 재미가 있다.
그 정도의 복식과 그 정도의 잔잔함이 좋은 듯하다. 그래서 전에 보았던 <작은 아씨들>도 좋았다.
천하의 헤르미온느 엠마왓슨이 메그 역을 맡아서 조금 당황은 했지만-당찬 기세로 말하면 시얼샤 로넌에 지겠느냐 싶었는데-복병인 플로렌스 퓨가 너무 셌다.
대고모 말씀 듣고 각성하던 눈빛.
그래, 헤르미온느도 플로렌스 퓨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작은 아씨들은 결국 에이미의 이야기가 되었다. 원작 읽을 때는 조에만 집중해서 봤었는데.
비행기를 내려서 가이드의 깃발 아래 집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이전에는 통과했던 러시아 상공을 돌아 나와야만 해서 비행이 한 시간 반 더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쟁.
뉴스로도 신문으로도 이번 전쟁을 접했고, 아주 가까운 과거에 우리나라의 이야기였던 것임에도 잡히지 않는 무언가처럼 아득하다.
나에게는 멀리 빙 도는 한 시간 반의 불편으로 다가오는 전쟁.
그 하늘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을까.
피곤이 풀리지 않아 약간 멍하다. 버스에 몸을 싣고 아우토반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