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취미 연대기
한국의 여가 문화가 많이 발전하고 있음을 느낀다.
한때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법은 음주나 맛집 탐방이 대부분이었는데, 요즘은 다양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소위 '취미부자'는 못 되는 사람이다.
캠핑은 짐을 꾸리고 펼치는 게 까다로워서,
뮤지컬이나 공연 보기는 티켓팅에 성공하기 어려워서,
등산은 힘들어서,
스쿠버다이빙은 깊은 물에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 등등 이유도 많다.
아주 예전부터 꾸준히 즐기는 취미를 꼽자면 책 읽기, 일기 쓰기로 정적인 것들. 장비나 공간을 크게 요하지 않는다. 간헐적 취미라면 하염없이 걷기와 전시회 관람까지 추가.
한때 책을 많이 모으기도 했지만 결혼으로 독립하면서 대부분 정리하여 이제는 남은 책도 별로 없다.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우선 밀리의 서재 어플에 검색하고, 없는 경우 중고서점을 이용한다.
이제 딱히 즐기지 않는 취미라면 맛집 탐방, 그리고 음주를 꼽고 싶다.
음악 페스티벌 다니기도 나름의 취미였다.
본격적으로 일할 때쯤 이태원이 확 뜨면서 다양한 맥주를 마시는 문화가 퍼졌는데 그때 이곳저곳 다녔다. 대학 때 음주를 즐기지 않았던 건 술이 싫어서가 아니라 맛없는 술을 마셔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을 계속 마시다 보면 주량이 진짜 는다는 것도 경험하고.
퇴근 이후 저녁식사 겸 친구를 만나게 되니 술과 페어링 할 음식도 다양하게 접했다.
한잔하고 집에 가면서 고개를 들면 초가을 약간 선선한 저녁하늘이 알딸딸하니 아름다웠다. 참 즐거웠다.
음악 페스티벌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음악에 맞춰 신나게 뛰고 논 것도 재미있었던 경험이다.
다 요즘은 하지 않는 취미들인데(맥주는 집에서 가끔 마시지만), 그때가 딱히 후회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쯤 놀러 다녀 보지도 못하고(?) 접어든 30대의 나에게 목적 없는 억하심정이 생겼으리라 짐작한다. 정말 재미있게 인생을 누린 사람들에 비하자면 내세울 정도가 못 되겠지만.
그리고 요즘 빠져든 새로운 취미라면 번역이겠다.
시작할 때에는 당찬 부업으로 목표를 잡았지만, 생각보다는 들어오는 돈이 소소해서-내가 공격적이지 않아서인 탓이 크다-지금은 돈 되는 취미로 약간 하향조정된 상태.
그리고 번역으로써 '돈 되는 취미를 가지라'던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부캐 전성시대, 멀티 파이프라인 만들기가 유행하기 전에도 그런 말은 많았다.
이왕이면 의미 없는 소비보다 취미를 가져도 돈 되는 취미로 가지라고.
남의 말에 토 달고 싶지 않아 별 말은 안 했지만-인플루언서들이라 논쟁하러 찾아갈 수도 없었다-이상하게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취미가 왜 꼭 돈이 되어야 하나?
즐거움만으로 그 가치를 다할 수는 없나?
초보 한의사. 직장에서 어서 능력을 키우고 더 효율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당시였다.
퇴근한 후에는 확 풀어지고 싶은데 취미마저도 이익을 찾으라는 말은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본업에서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지금,
그리고 돈 안 되는 취미만 실컷 하다가 처음으로 돈을 벌어 본 지금에서야 그 말에 숨겨진 의미가 조금은 이해된다.
음주나 맛집 탐방, 음악 페스티벌을 지금은 그다지 찾지 않는 이유가 있다.
(음악 페스티벌만 적었으나 여러 영화제도 다니고, 소규모 축제들도 열심히 다녔다.)
처음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듯 즐거웠던 그 취미들이, 몇 년 해 보니 익숙해져 새로운 기쁨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초보 한의사 때는 침 봉지도 손 덜덜 떨며 뜯던 내가 이제는 환자들의 웬만한 호소에 놀라지도 않듯이.
체력이 떨어지면서(?) 알딸딸한 기분 좋음보다 내일 출근까지 회복해야 할 체력이 더 걱정되기 시작했고,
인파에 치이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심장을 쿵쿵 울리던 음악보다 사람의 목소리 없는 재즈, 더 기운 없을 때는 클래식을 찾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러한 취미가 나에게 '남는 것'이 없다는 느낌이 점점 커졌다.
체력이 줄어든 만큼 뭔가를 시도할 때 그만큼 나에게 무엇이 돌아오는가? 이것을 꼭 생각하게 되더라.
예전의 취미들이 좋은 추억을 남겨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마당이니 추억도 없고 그저 시간과 돈, 체력 모두를 소모하고만 있다고 느껴지는 것. 그쯤에는 '아, 차라리 옷을 사거나 화장을 했으면 옷 고르는 센스나, 하다못해 화장 실력이라도 남았을 텐데.'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크게 매료되었던 취미가 점점 시들해지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래서 그다음으로는 '남는 취미'를 찾기 시작했다.
지난 부동산 상승장에 뛰어들지는 못했으나 경제신문 읽기, 부동산 강의 듣기, 임장 다니기 등.
내가 사는 도시의 부촌부터 시작해서 인근 도시까지 임장을 다니기도 하고,
강사가 꼭 외우라고 뽑아 준 좋은 입지의 조건을 따로 프린트해 책상 한 켠에 꽂아 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막상 해 보니 왜 길게 이어가는 사람이 적었는지 알겠더라.
머리에 남는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번에는 재미가 없었다.
재테크라는 분야가 워낙 긴 호흡과 목돈을 필요로 하니 강의 듣기나 임장 다니는 것이 소위 '빌드업'만 계속하는 것 같았다. 단기간에 돌아오는 자잘한 보상이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안 외워지는 단어 열심히 눈에 넣던 기간보다 신혼집 알아보는 짧은 기간에 더 많은 것을 알았다.
지금은 매일 새로운 소식을 전달해 주는 경제신문 읽기만 지속하는 상태. 그리고 폰에 받아 둔 여러 부동산 어플로서 흔적만 남아 있다.
유튜버 되기, 블로그로 파이프라인 구축하기 등등의 책도 어플에 담기는 했지만 그 빌드업 어느 세월에 하죠..? 그리고 빌드업한다고 인플루언서가 될 수는 있는가?
이 쪽은 책만 읽어 보다가 취미로서 시작도 하지 않고 접었다.
이제는 요리를 새 취미로 삼아야 하나, 사람들이 이렇게 심심하면 아이 낳을 결심을 하게 되는 건가-
그러다 번역을 아주 우연한 기회로 접하게 되었다.
번역을 접했다기보다, 번역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하는 이야기를 인터넷으로 본 것.
왜인지 이건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누구든 영어가 아주 낯선 사람은 없고, 나는 공부도 나름 열심히 했고.
번역 같은 일은 꾸준히 나를 구축하는 퍼스널 브랜딩도 필요 없고, 그냥 연차 맞춰 자잘한 일부터 받아 나가면 되는 것이니까. 이력서 돌리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번에는 무엇보다 그 방향이, 열심히 하다 보면 머리에도 뭔가 '남는 것'이 있겠다 싶어 선뜻 손이 나갔다.
그리고 이토록 게으른 초보 번역가로 살고 있음에도 어쨌든 어제부로 두 번째 납품대금을 지급받았다.
뭔가 나아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자신감과 내게 돌아오는 작은 보상.
이것이 술을 마시거나 맛집을 다닐 때만큼의 짜릿한 쾌감을 주지는 않지만, 흥미를 느끼고 꾸준히 지속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준다.
나만의 글을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것도, 라이킷이 쌓이면서 새로 잡은 취미이다.
그전에는 스마트폰 일기장에만 글을 썼기에 기승전결도 없었고 메시지가 있다기보다는 순간의 감정을 쏟아놓는 데만 집중했었는데.
하나, 둘 쌓이는 라이킷을 보고 글에 기승전결을 어떻게든 만들어 완결하게 된 것.
보상이라는 게 이래서 무섭다.
오늘도 나는 '남는 취미'에 깊이를 더하고자, 번역 구인 사이트 프로필에 샘플 번역문을 추가했다.
어제 대금을 지급한 에이전시에 요청문도 보냈다. 아무도 평가하지 않은 나의 프로필에 평점을 작성해 달라는 내용이다.
빠르게 성과를 내겠다는 조급함을 접고-초보자로서의 나를 즐기면서-지금은 새로운 취미에 빠져들 때이다.
뭔가 남는 것, 꼭 돈이나 지식이 아니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