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상담시간을 정
해두자
라뽀rapport란?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영어 라뽀. 의사들 사이에서는 '환자와 신뢰를 쌓아가는 일' 정도의 의미이다.
의사와 라뽀가 있는 환자는 치료계획을 믿고 성실하게 참여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위해서도 환자와 라뽀를 잘 쌓는 것이 중요하다.
라뽀가 없는 환자는 처음부터 의사의 의도를 의심하거나 (돈 벌려고 이러나?) 어물어물 치료를 시작했어도 중간에 증상 기복이 생기면 의심을 확신하며 하차하기 쉽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는 장기 치료라면 라뽀가 있을 때 더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려면 서로 '알아야' 한다.
환자를 알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스몰 토크이다.
스몰 토크small talk의 중요성
우리말로는 한담(심심하거나 한가할 때 나누는 이야기)라고도 불리는 스몰 토크. 서로 어느 정도 예의 차리는 장소에서 편해지려고 나누는 간단한 신변잡기 대화로 볼 수 있다. 실제 진료하는 현장에서도 스몰 토크가 당연히 많은 도움이 된다.
한 증상으로 오래 치료하는 재진 환자에게서 스몰토크는 더 빛을 본다. 계속 치료하는데도 컨디션이 오르락내리락할 때 대체로 환자의 생활습관에 그 해답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증상에 대해서만 질문하면 '좋아졌어요/나빠졌어요/그대로예요' 밖에 나올 대답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의사가 바로 원인을 잡아낼 수 있게 말해 주는 환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환자는 증상에 대해서만 신경 쓰지 지난 일주일을 줄줄 말해야 할 의무가 없으니까.
그러면 의사가 물어보아야 한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 질문에 답이 있는 것이다.
요즘 어떠세요?
지난번 치료하고서는 좀 어떠셨어요?
이 질문의 답은 곧 지난 치료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만큼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었던 게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소 뻔뻔하게 마음먹고 먼저 묻기 시작하자 의외로 환자들은 편안하게 대답해 주었고 꼬치꼬치 자신들에 대해 묻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세심하게 환자를 챙긴다며 좋은 피드백도 얻었다.
차트에 쓸 거리가 늘어난다는 것은 환자에 대해 그만큼 잘 파악한다는 이야기니까.
더 좋은 한의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환자가 더 잘 낫는 것을 원한다면 아예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모든 걸 다 알 필요는 없다
당연히 환자의 사생활을 다 알 필요는 없다.
단골 환자분들이라면 자주 보며 생활패턴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만, 그렇다고 환자 입장에서 '선을 넘는다'라고 생각할 질문은 가급적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건 왜 묻지? 하는 생각이 안 들게 하려면 환자의 신체 증상과 관련 없는 질문은 먼저 하지 않는다.
특히 개인정보에 민감한 젊은 환자들의 경우 더욱 그렇다.
신체증상과 관련 있어도 '어떤 일을 하세요?'같이 직업 같은 개인정보 관련 질문보다는 동작이나 자세에 집중해 묻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뒷목이 자주 굳고 뻐근한 환자라고 한다면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세요?', '책상에 오래 앉아 계시는 편인가요?'라고 묻거나
허리 아픈 환자라면 '평소 오래 서 계시는 편인가요?', '무거운 물건을 자주 나르시나요?' 등
오늘 아픈 그 부분에 무리가 되는 일을 평소에 하는지 물어보자.
오랜 기간 불편함이 누적된 환자들도 원인이 정신적 스트레스에 걸쳐 있는 것 같다면 바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은 삼가는 것이 좋다.
가려운 곳 긁어준 듯한 시원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지만 방어기제로 갑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드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감'이 생기기까지는 무리할 필요 없다.
서서히 접근하면 된다.
나만의 킬링 멘트 찾기
환자의 마음이 열리는 마법의 멘트가 있을까?
답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이다.
의사마다 자기에게 유독 잘 붙는 멘트가 있다.
본인이 잘 이해되는 처방법, 침법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배우면 써 보고 아니면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면 킬링 멘트는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
1. 선배의 진료를 직접 보는 참관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러 곳을 가 볼 수 있고, 멘트에 대한 환자의 반응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방법은 참관받는 원장들의 근무 시간에 일어나야 하니 일단 쉽게 성사되기 어렵고, 하루 가서 보는 것만으로는 다 알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가능하면 이 방법을 가장 추천한다.
2. 페이닥터로 취직한 한의원 대표원장님 참관
대표원장들은 페이닥터가 일 잘하는 것이 곧 자신들의 수익 증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참관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잘 들어 두고 꼭 환자에게 말해 보고, 반응이 안 좋았다면 왜 그랬을까 대표원장에게 피드백을 듣는다면 베스트이다. 참관에 가장 호의적이고 피드백도 적극적이라는 면에서 좋은 방법이다.
대표원장과 페이닥터의 진료 분야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라면 어떨까?
역시 방법은 있다. 자기만의 멘트를 이리저리 시도해 보고 피드백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만의 멘트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난감할 수 있다.
3. 인터넷 활용
마지막 방법이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커뮤니티 등 열린 곳에 자기만의 상담 멘트를 공개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기지 말고 한 번씩은 자기 입으로 뱉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자기 것이 아닌 멘트를 던지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어색해진다. 하지만 어색해지더라도 이 말 저 말해 보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잘 반응하는 나만의 '킬링 멘트'를 찾을 수 있다. 인터넷에 쓰여진 멘트를 그대로 말하지 말고 자기에게 잘 붙는 말투로 약간씩 바꾸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위에 적은 세 가지 방법을 모두 활용했다.
대표원장님과 진료가 겹치는 날에는 꼭 물어볼 거리를 들고 가서 피드백을 얻었고(이렇게 하면 한의원 적응도 아주 빨라진다), 그렇지 않은 날은 동기들이나 선배에게 물어보며 진료 방법을 다듬어 나갔다.
정성 들여 답해 준 사람들에게 기프티콘 등 작은 성의로 답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1명당 상담 시간은 미리 정하자
한 명을 상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최대치를 정해 두자. 페이닥터라면 한의원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 좋다. 그 원장님의 지난날을 통해 얻은 최적의 결론일 테니까.
상담이 그보다 더 일찍 끝나도 좋고, 길어지더라도 마음먹은 진료 시간에 맞출 생각을 처음부터 한다면 대기 환자가 심하게 밀리지 않을 것이다.
1. 한약 상담
- 초진 20~30분
- 재진 10~15분
2. 치료 위주 상담
- 초진 10~15분
- 재진 10분
이 이상 넘기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진료예약을 잡는 일반적 시간 간격이 보통 이쯤에 맞춰진다.
진료대기가 밀렸다면
환자가 반드시 자기의 모든 과거 병력을 다 털어놓아야 하는 성미이거나,
예상보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은 환자라면 마음먹었던 시간보다 진료가 길어지게 된다.
데스크에서 원내 메신저를 통해 계속 '원장님 대기 있어요ㅠ!' 하며 압박해 들어올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쉽지 않다. 한 번 탄 이야기의 흐름을 싹둑 자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야기를 갑자기 종결하려고 하지 말고,
일시 중단하고 나중에 다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1. 이후 침 치료가 있는 환자
"자세한 부분은 이따 침 치료하면서 제가 좀 더 여쭤볼게요."
2. 상담만 하는 환자
가능하면 상담을 빠르게 마무리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아니면 솔직하게 대기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바로 대화를 끊고 환자를 내보내야 할까? 아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대기 환자분들이 많이 계셔서요. 잠시만(대략 20~30분 정도 잡는다) 기다려 주시면 제가 환자분들 빨리 보고 다시 모셔도 될까요?"
이 말을 하는 것은 여기에서 끝내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와의 대화를 '다시' 이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는 것이다. 사정상 당장은 어렵지만, 바로 다시 돌아와서 당신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뉘앙스대로 전달해야 한다.
꼭 해야 할 말이 남아 있다면 당연히 기다릴 것이고,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면 보통 여기서 마무리된다.
환자의 기분이 상하는 순간은 의외로 치료 술기나 효과보다도 응대 태도가 이유였던 경우가 많다.
의도를 부드럽게, 확실히 전달하면 크게 문제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