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_메릿(Merritt)에서 살기 ⑤
우연한 인연은 시간 속에서 숙성된다.
집주인이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정말 선하고 좋은 분이었다. 그만큼 1년 가까이 그분들과 함께 산 시간들이 즐거웠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면 나 또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두 분과 함께 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아들이자 집사가 되었다.
캐나다에서는 주기적으로 집 앞 잔디를 깎아줘야 한다. 잔디 깎는 게 해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자기 집 잔디 깎으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 깔끔하게 깎여진 잔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흐뭇해지기도 한다. 내가 잔디를 깎고 있으면 그걸 보는 할머니도 미소를 띠면서 흐뭇해하신다.
또한 겨울에 눈이 오면 집 앞 도로의 눈을 치워야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진 못했지만 얻어들은 풍문으론, 자기 집 앞 눈을 안 치워 누군가 그곳을 지나다가 넘어져서 다치면 집주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눈 내린 아침이면 나는 집 앞의 눈을 깔끔하게 치웠다.
노인 두 분이 사는 집이지만, 가끔은 사람 힘이 필요한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무거운 물건을 옮겨야 할 일도 있고, 이런저런 사소한 공사도 생긴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뒷마당에 안방 크기만한 텃밭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나는 삽으로 땅을 다 갈아엎고, 골을 판 다음 물을 흠씬 뿌려놓기도 했다.
두 분과 생활하면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은 함께 게임을 할 때였다.
처음에 내가 놀랬던 건 집 안 곳곳에 게임 도구가 엄청 많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로 주사위 게임과 마작 비슷한 게임이었지만, 그 외에도 종류가 다양했다. 어릴 때 자기 보물을 집 안 여기저기 감춰놓듯, 곳곳의 서랍마다 게임 도구가 숨어 있었다. 두 분은 나랑 게임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셨다. 게임은 대개 내가 어렸을 때 했던 것과 비슷했다. 사실 말로 두 분을 웃겨드릴 재주가 없으니 게임할 때 과장된 행동을 많이 하기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두 분은 거의 자지러지듯이 웃으셨다. 올 초에 쓴 책 ≪나는 엄마와 함께 살기로 했다≫에도 그 장면 하나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인용하면 이렇다.
함께 살면서 내게 유행어도 생겼다. “way too much!!!”
셋이서 간간이 주사위 게임을 하곤 했는데, 게임 중에 할아버지가 던진 주사위 개수가 필요한 수보다 더 나올라치면 내가 “way too much!!!”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럴 때면 두 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거의 자지러지셨다. 암 투병 중이신 할아버지가 그렇게 밝게 웃으시는 게 보기 좋아 나는 틈만 나면 부러 그 말을 남발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그 말을 듣기 위해 일부러 게임을 제안하시는 듯했다.
지금도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내가 무심한지, 세월이 무심한지 연락을 못 드린 지 한참이 지났다. 세상일이란 게 바람대로만 되겠는가마는, 그래도 모쪼록 건강하시길 빌 뿐이다.
캐나다에 와서 나는 슬랩스틱 코미디언이 되어 있었다.
특히 할머니는 잊을 만하면 아래층으로 내려와 은근히 함께 게임을 하자는 의사를 내비치셨다. 그럴 때면 나는 윗층으로 올라가 함께 놀았다. 할머니의 맛있는 쿠키와 아이스크림은 덤이었다. 나 또한 식탁에 둘러앉아 게임을 하면서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삭혔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도 노후 준비가 큰 화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안정적인 노후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바치고 있다. 노령화 사회로 갈수록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개인적인 성향상 나는 노후를 가끔 걱정은 하지만 그리 크게 맘에 두고 살지는 않는다. 걱정만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현재의 시간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만한 돈도 없으면서 그냥 그렇다. 이런 이야기는 한번 꺼내자면 긴 얘기이니 여기서는 이쯤 해두자. 하나만 덧붙이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데, 그 근저에는 연금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미국 국적이라 미국에서 연금이 나오고, 할머니는 캐나다의 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고 했다. 두 분의 연금을 합치면 꽤 많아서 사시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곁에서 지켜본 두 분의 생활은 단조롭지만(이건 그분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 캐나다의 생활은 동양인의 눈에는 어디든 조금은 단조로워 보인다), 꽤 여유 있는 노후 생활처럼 보였다. 두 분은 매일 아침 8시면 차를 끌고 마을 외곽에 있는 맥도날드에 가서 커피를 드신다. 대략 1시간쯤 아침 커피를 즐기시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 다음 교회와 이런저런 봉사 활동으로 시간을 보낸다. 저녁에는 주로 TV 시청과 성경책 읽기, 이런저런 게임을 하신다. 또한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도시이다 보니 마을에 무슨 행사라도 있으면 열심히 참석하신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오면, 일 년에 한 번, 한 달 일정으로 따뜻한 미국의 플로리다로 여행을 다녀오신다.
나와 함께 살 때에도 내게 집을 맡겨놓고 다녀오셨다.
사는 동네에서 플로리다로 갈 때는 차를 몰고 미국의 시애틀까지 대략 예닐곱 시간을 운전해서 간 다음, 비행기로 갈아탄다고 했다. 내가 놀랬던 건 여든 살이라는 연세도 연세이지만, 파킨슨병으로 몸 왼쪽 전체가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직접 운전을 하신다는 거였다. 여튼 그 소리를 듣는 나만 불안했지, 정작 두 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언젠가 한 번은 마당 작업에 필요한 모레를 가지러 할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탄 적이 있었다. 사고가 날 마을도 아니었고, 워낙 조심스럽게 천천히 운전을 하셨지만, 내 마음은 사실 조마조마했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캐나다의 시골에서 혼자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두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 싱싱한 배추가 좋은 양념을 만나 맛나게 숙성되듯, 나 또한 그분들 덕분에 조금은 성숙해졌다. 長毋相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