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답을 알고 있다

by 해림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나를 만든다. 삶을 돌아볼수록 이 말을 크게 느낀다. 때론 내가 훨훨 날아가도록 힘을 실어주기도 하지만, 내가 더 나아가지 못하게 가두는 덫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ㅇㅇ있는 아이, ㅇㅇ 없는 아이' 식 제목의 자기 계발서 만화가 유행했다. 미소녀들이 나와 어떻게 행동해야 인기가 생기고, 센스가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는지 알려주었다. 어느 순간 만화는 반 여자 아이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더 나아가 우리는 직접 미소녀를 그리기까지 했다. 이때 꼭 만화가 수준으로 그려오는 애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선을 구사하는 능력부터 달랐다. 뭉툭하고 투박한 내 그림과 달리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이 섬세하고 날카롭게 미소녀를 그렸다. 이들의 미소녀는 대체 왜 나와 다른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림체 차이에 나는 연필로 그렸고 저들은 샤프로 그려서 그랬거니 혼자 짐작했다.




이제 모두가 샤프를 쓰게 된 시기로 넘어간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일 것이다. 미술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미술을 배워보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하니, 엄마가 나와 동생을 함께 미술 학원에 등록시켜 주셨다. 몇 주 간의 기초 수업이 끝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그림 하나를 보여주시더니 똑같이 그려보라고 하셨다. 드디어 배운 것을 써먹을 날이 왔구나! 이 날을 위해 피 (안) 나는 노력을 해왔다. 나는 한쪽 눈을 감고 연필을 이용해 구도를 잡았다. 그동안 연습한 대로 데생을 하며 따라 그렸다. 이제 채색할 차례이다. 섬세한 붓 터치와 물 조절에 전력을 다했다. (선생님의 터치가 많이 들어갔지만)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와 뿌듯했다.


동생은 어떻게 되어가나 궁금해져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순간 나는 당황했다. 동생의 데생과 붓터치는 나의 것과 뭔가 달랐다. 샤프를 사용해 미소녀를 그렸던 친구들이 떠올랐다. 누가 봐도 동생은 미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그나마 첫 시간이라 이 정도였지 이후에는 실력의 차이가 더 심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그림 실력은 늘지 않았다. 처음으로 재능 차이를 느꼈고,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내 안에 아주 깊은 목소리가 새겨졌다. "나는 미술에 재능이 없어!"




미술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미술적 요소가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기피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거나 미적 감각을 요구하는 일이면 내 안에 새겨진 목소리가 내게 속삭였다. "나는 미술에 재능이 없어!" 그러니까 나는 머리 스타일링 못해. 메이크업 못해. (심지어) 가위질도 못해.


하지만 모닝 페이지를 쓰는 아침에는 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계속 자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더 자고 싶은 생각을 이겨내고 몸을 일으켜 베개 옆에 놔둔 공책을 펴면 본능과 무의식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나온다. ‘더 자고 싶다. 오늘 아침은 뭐 먹지. 짜증 나게 꿈에 누가 나왔다.’ 등등 온전한 정신이었으면 굳이 쓰지 않을 법한 것들을 쓰게 된다. 그러다 쓸 말이 고갈되어 무의식의 이야기를 기다리면서 멍- 하니 있다 보면 뜬금없는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어느 날은 갑자기 디자인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깜짝 놀라 집 나간 정신도 돌아왔다. 일단 생각이 나서 쓰고 있긴 한데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래? 그림도 못 그리고,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를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디자인? 모닝 페이지가 소개된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 줄리아 카메론은 이런 생각에 주저하지 말라고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필터링하지 말고 솔직하게 공책에 적는 거다.




생각해 보면 가까운 곳에 내 한계를 막고 있는 (나쁜 의도 없는) 빌런들이 많았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벼운 평가가 나를 가둘 때가 있고, '이성적으로' 혹은 '현실적으로'라는 말이 내 앞길을 막기도 한다. 나의 경우 어린 시절 깊이 새겨진 미술에 대한 슬픈 기억으로 디자인은 아예 내가 닿을 수 없는 영역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나는 콘텐츠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구현하려면 디자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뛰어넘지 못했다. 잘하고 싶은데 잘하지 못할 걸 아니까 늘 포기했다. 같이 할 사람을 찾아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직접 해볼 생각은 안 했다. 그런 나에게 모닝 페이지가 하고 싶은 걸 깨닫게 했다. 아마 이브닝 페이지였다면 깨닫지 못했을 거다. 밤에는 생각이 너무 많다. 괜히 진지해지고, 센치해져서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할 수 없는 이유를 열 가지 이상 생각해 내고, 그 생각에 주눅이 들어... (더 보기) 다행히 모닝 페이지라 무의식이 있는 그대로 작동했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만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무의식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 나 미술엔 잼병이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일이 꼭 잘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취미가 될 수도 있는 거고, 처음엔 못해도 하다가 의외의 재능을 발견할 수도 있는 거니까. 점점 희망 회로가 돌아가며 갑자기 자신감이 들었다. 까짓 껏 디자인? 해보지 뭐!


그래서 뭘 시작했냐면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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