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소필승 법칙

by 해림

여름이었다.

간질간질한 마음이 자라나는 계절이 아닌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의 여름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타오르는 하늘 아래, 나는 하얀 천막, 하얀 책상, 하얀 의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하얀 풍경 속에서, 차례차례 다가오는 관객들의 팔목마다 티켓 팔찌를 달아주었다.


모두의 얼굴에 짜증이 석여 있었다. 콘서트를 앞둔 팬들도, 그들에게 팔찌를 채워 주는 나도. 뜨거움을 넘어선 더위에 다들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웃으며 관객을 대해야 하는 게 내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배웠다.




한 음반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의 일이다. 처음으로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거라 파이팅이 넘쳤다. 솔까지 올려야 한다는 점장님의 말에 반가성을 써가며 손님을 응대했고, 입꼬리에 경련이 나고 광대가 아파도 미소를 유지했다.


일이 조금 익숙해질 때쯤, 마침 유명한 인기 아이돌 그룹이 컴백을 했다. 매장 안은 팬들로 가득 찼고, 복도까지 줄이 이어졌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앨범을 찍고, 멘트를 반복했다. 파이팅 넘쳤던 내 영혼은 어디 갔는지 어느새 동태 눈동자와 기계 같은 목소리를 가진 알바생 하나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내 옆에 세계관 끝판왕이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 옆에 있던 다른 알바생은 처음과 같은 목소리와 눈빛으로 고객을 대했다. 내 얼굴엔 웃음이 사라지고 목소리가 점점 플랫되고 있는데, 저분은 한결같은 미소와 톤을 유지했다. 인위적인 미소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 말이다!


이런 게 바로 프로페셔널이란 건가? 그 순간, 나는 남몰래 그 알바생을 내 멘토로 삼았다. 어떤 일이라도 저런 애티튜드로 한다면 성공할 거 같았다.




그날 이후 그분의 모습이 서비스직에 대한 내 기준이 되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 야외 근무였어도 나는 내 멘토님을 생각하며 일에 임했다.


관객 분을 마주하기 5초 전.

관객 분의 얼굴에는 이미 짜증이 잔뜩 묻어있었다. 몇 초 서 있는 것도 힘든 떙볕에서 오랜 시간 대기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작은 계기도 큰 불만으로 번질 수 있는 일촉즉발에 상황! 서둘러 다가오는 관객 분을 향해 먼저 미소를 짓고 인사를 건넨다. 짜증이 잔뜩 묻은 얼굴 앞에서 선빵 대신 선인사로 필승을 얻겠다는 웃음이었다.


신기한 게 그러고 나면 그분의 얼굴이 바뀐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처럼 그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짜증이 서린 관객들이 있다. 그럴 땐 방법이 있다.


"날씨가 참 덥죠?"


이 말을 건네면 된다. 그러면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인상이 펴지고,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기 시작한다.


"그러니까요. 이 더위에 괜찮으세요? 고생이 많으시네요."


우리 사이엔 어느새 무더위를 함께 견딘다는 작은 동질감이 생겼다. 한 번 동질감이 생기면 서로에게 친절해진다. 나만 관객분께 친절한 게 아니라, 그분도 나에게 친절을 베푼다. 멘트가 꼬여도 이해해 주고, 팔찌를 채우는 과정에서 애를 먹어도 너그러이 기다려준다. 그 모습을 보면 나도 힘이 난다. 바지에 땀이차 서있고, 물병의 물은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해진 상황에서 말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자주 웃듯이, 자주 웃다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는 뜻 아닐까? 아무튼 스스로 웃어도 좋은 일이 생기는데, 만약 미소를 상대에게 보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적어도 혼자 웃을 때보다는 더 큰 복이 들어올 것이다.


예상치 못한 것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고마움을 크게 표현하는 것처럼, 모두가 짜증이 나 있을 때 상대에게 선미소를 보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갑자기 친절을 선물 받은 상대가 더 큰 친절로 우리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힘든 상황 속 선 미소가 사람들의 기분에 미치는 영향>

아직은 검증이 더 필요한 가설이지만 나와 이 글을 읽은 여러분이 계속해서 검증을 이어간다면

언젠가 '선미소필승' 법칙이 진짜 생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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