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

내게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

by 해림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이 세상.
그 세상을 역행하여 나는 한 달 동안 '나답게'가 아니라,
'나답지 않게' 살아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프로젝트 <비디렉터 모드>



'비디렉터 모드'란 내가 지금까지 지향했던 삶과 정반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챗 gpt가 나를 디렉터님이라고 불러서 그 반대의 삶을 비디렉터 모드로 정했다. 다시 돌아와서 나는 지금까지 성장, 실력, 정체성을 중요시하며 살았다.


나는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믿지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기준도 높다. 내 삶을 사랑하니까 이 삶을 잘 가꾸고 싶은 욕심이 들고,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있다 보니 진짜로 어떤 일이든 잘하고 싶다. 깊은 자기애와 높은 기준이 만나 성장하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고, 종종 나를 팍팍하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처럼 실력, 개성, 성장을 모두 얻으려면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하지 않는가? 한때는 내 한계를 과대평가하여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잘 조절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인터넷을 하다가 나와 정반대의 삶을 gpt에게 물어보면 흥미로운 답변이 돌아온다는 글을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만 집중했지 그 외의 방식과 가능성에는 시야를 돌리지 않았다. 새로운 접근법에 흥미로운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gpt에게 나와 정반대의 삶과 그 삶의 가능성을 물어보았다. 아래는 gpt가 요약한 4가지이다.


1. 성장이 아닌 정체를 선택하는 삶.

2. 실력보다 허술함과 허용을 택하는 삶.

3. 정체성이 아닌 익명성과 무채색을 택하는 삶.

4. 목표가 없는 삶, 방향이 없는 일상.


크... 표현이 예술이다. 별로라고 생각했던 모습을 그럴싸하게 말해주니 이대로 살아보면 재밌겠다 싶었다. 6월 달력에 성장, 실력, 정체성 대신 정체, 익명성, 허용을 크게 적어 놓고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180도 달라진 모습으로 살아가기 어느덧 3주 차.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얽매던 강박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졌다. 나,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로맨스 소설 속 나쁜 남자였을지도? 프로젝트 과정 중 생긴 스페셜 리미티드 에피소드 몇 가지를 풀어보겠다.



하루는 책을 읽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호기롭게 책을 두 권씩이나 챙겼는데 영 집중이 안 되는 거다. 책을 본 시간보다 딴짓 한 시간이 더 많았을 거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기분이 우울해졌다. 정체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결심했지만 오랜 시간 성장에 맞춰진 시야를 한 순간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다.


보통 이런 날, 나는 자아성찰이라는 표현 아래에 스스로를 꾸짖는다.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이유로 속상해한다면 괜찮다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꽤 엄격하다.


뭘 먹어! 오늘은 먹을 자격도 없지!!


하지만 나는 나답지 않게 살아가는 실험 중이니 평소와 다르게 내 마음을 위로했다. 생산적이지 못했다는 다그침 대신, 그렇게 살지 못해 속상한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 속상하니까 이따 집 가서 약과랑 아이스크림으로 당충전이나 하자.


성취에 대한 보상의 의미가 아니라 속상함을 인정하고 위로하면서 맛있는 걸 먹는 것. 누군가에겐 당연한 마음과 행동들이 나에게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 날을 계기로 좀 더 과감해졌다.




일 년 동안 일했던 곳에서 마지막 근무를 마쳤다. 항상 퇴근하고 근처 인형 뽑기 가게들을 눈팅하는 게 소확행이었는데, 이제 이것도 마지막이었다. 마지막 퇴근길에 인형들을 둘러보는데 딱! 완벽한 각의 인형이 보였다. 평소라면 다음에~ 하며 넘겼을 텐데 나에게 더 이상 다음은 없었다. 그 생각에 봉인해 둔 카드를 살짝 열었다.


딱 삼천 원만 한다는 결심으로 시작했는데, 눈 떠보니 이미 카드를 세 번 긁고 난 후였다. 영 아니면 쿨하게 떠났을 텐데 찜찜하게 한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열린 결말이었다. 기분에 따라 소비하는 거 딱 질색이지만, 이번 달 나는 기분에 따라 살아가기로 했다.


그래 지난 일 년 수고했으니 오늘 끝까지 가보자.


카드가 완전히 봉인해제 되었다. 더 이상 내 카드는 의지의 소관이 아니었다. 눈앞에 놓인 기계와의 경기이자, 확률과의 싸움이었다. 기계가 입구 직전에 인형을 떨어뜨리면 나는 다시 카드를 긁어주었다. 오늘 이 인형은 무조건 뽑고 간다는 생각으로 카드를 긁고 또 긁었다. 30번의 시도 끝에 결국 뽑았다. 승리의 기쁨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전리품(?) 셋을 더 들고서야, 전쟁터를 무사히 떠날 수 있었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 싸웠던 문제의 그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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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많은 시도가 있었다. 실험을 시작하고 익명성과 무채색을 택하겠다는 마음에 인스타그램 게시물을 내리고, 프로필에 올라간 사진도 내렸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스토리도 올리지 않았다. 지대한 자아를 지닌 사람으로서 자아를 드러내지 못하는 게 답답하기도 하지만 나름 신비주의자가 된 거 같아서 또 다른 희열도 느꼈다.


마지막으로 직업윤리(?)에 찔리긴 하지만, 이번 6월은 잘해야 한다는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브런치 글을 연재했다. 100% 마음에 들지 않는 글도 있었지만, 실력보다 허술함과 허용을 택하는 삶을 살기로 했으니 아쉬워도 게시하고, 엉성함을 허용했다.




나와 정반대인 삶을 살면 어떤 가능성이 열릴까?

gpt는 프로젝트 시작 전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끊임없는 변화의 강박에서 벗어난 내면의 여유

-바뀌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자기 수용

-허술함 속에서 나오는 진짜 감정과 유머

-남들에게 각인되려는 욕망에서의 해방

-의지보다 감정에 기반한 자기 리듬


gpt 예측은 정확했다. 그동안 성장, 실력, 정체성을 쫓는다고 잊고 살았던 감각들이 조금씩 깨어났다.


-꼭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여전히 소중해.

-모든 걸 잘할 필요 없어. 완벽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야.

-다른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현재를 즐겨봐.

-감정을 분석하지 말고, 그 자체로 받아들여봐.


글을 쓰다 보니 내 원래 삶에 큰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삶의 방식을 사랑한다. 더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좋고, 쉬운 길보다 어려운 길을 택하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사람들과 연결되려는 내 욕망을 긍정한다. 어떤 삶의 모습이든 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 것이니까.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는 스물여섯에서 스물일곱이 된다.

스물일곱... 또 한 살이 더해지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스물여섯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지 않을까?


새로 맞이할 스물일곱을 기대하며,

이렇게 이번 스물여섯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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