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시 순례 에세이: ① 순례여정의 시작
15년 넘게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나는 조기 은퇴를 고려할 만큼 경제적으로 준비된 것도 아니었고, 퇴사 이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생각이 명쾌하게 정리된 것도 아니었다. 2020년 코로나가 확산되는 시점과 맞물려 반갑지 않은 무기력이 찾아오고 나는 갑자기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길을 꾸역꾸역 현실에 맞춰 계속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안쓰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은 무엇일까 ‘ 40대인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내가 정상인가 싶기도 했다. 문득 내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 속으로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디뎌 본 적이 있었는지 자문하게 되었다.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하고 싶은 열망, 내 삶을 하루하루 진실되게 살고 싶은 갈망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졌고, 2022년 1월 어느 날 회사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나로 하여금 전격 퇴사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니기 시작한 내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던 곳을 나와 자발적으로 백수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퇴사 이후 정확히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였다. 미국 워싱턴 D.C. 에 살고 있는 마가렛이 오래간만에 반가운 이메일을 내게 보내왔다. 기도 중에 자꾸 내 생각이 나는데, 자신이 속한 단체에서 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인 리더십 프로그램에 내가 참여해 보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마가렛은 당시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는지 혹은 그만뒀는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너무나 정확한 시간에 내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을 소개해 준 것이다. 마가렛이 소개해 준 프로그램은 18개월이라는 상당히 긴 시간의 리더십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가렛이 추천해 준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겠다고 이메일 답장을 보냈다.
나는 곧 코로나 덕분에 미국에서 진행되는 리더십 프로그램을 온라인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관심을 끄는 또 다른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마가렛이 속한 단체의 이메일 뉴스레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두 달 후인 4월, 이탈리아 아시시(Assisi) 순례여행이 예정되어 있는데, 이 순례 여정에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세 사람을 애타게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마가렛이 종종 마가렛 자신이 인도하는 그 순례여행에 내가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던 바로 그 순례여행이었다. 적지 않은 참여 비용으로 회사를 나오고 수입이 전혀 없던 나는 재정적인 부담으로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편 언제 또 내 인생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마가렛과 몇 번의 상의 끝에 나는 결국 아시시 순례 여정 시작 일주일 전에 순례에 참여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리고 부랴 부랴 항공권을 구매해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다.
아시시는 마가렛과 내가 처음 만났던 장소로 우리 두 사람에게는 매우 특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9월, 추석연휴 즈음 나는 내가 회사에서 낼 수 있는 최장의 휴가기간이었던 일주일을 더해 열흘간 아시시에서 나름의 리트릿 시간을 보냈었다. 바쁜 회사 일정도 일정이었지만 강도 높게 회사에 충성을 요구하는 직장 상사로 인해 나는 2012년에는 단 며칠도 휴가를 내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13년 가을, 2년 만에야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시시에서 맞은 어느 이른 아침, 나는 인근 다른 도시를 둘러볼 생각에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나이가 지긋이 있어 보이시는 한 백인 여자분이 여행가방을 끌며 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셨다. 당시 나와 그분이 기다리고 있었던 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은 탓도 있지만, 마침 그 버스정류장에는 그분과 나 단 둘 뿐이었기에 우리는 왜 버스가 오지 않는지 걱정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었다.
We meet no ordinary people in our lives. ― C.S. Lewis
그분은 그 이전에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직업인 영적지도자(Spiritual Director)로 자신을 소개했다. 당시 아시시에서 한 순례 그룹을 자신이 인도했는데 이제 그 프로그램을 마치고 미국 보스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언가 우리 대화가운데 서로가 깊이 연결된다는 느낌, 알 수 없는 어떤 잔잔한 기쁨이 있었다.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마가렛이 내게 본인의 이메일을 알려주며 한국에 돌아가서 꼭 연락을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책이라고 부랴 부랴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겉표지에 나를 위한 메모를 휘갈겨 남기고, 그 책을 내게 선물로 주고 떠났다. 2022년 봄, 나의 11일간의 이탈리아 아시시 순례 여정은 이렇게 9년 전 같은 도시의 한 버스정류장에서 벌어진 예상치 못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