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프레드릭 Oct 22. 2023

함께 만들어 낸 기적

아시시 순례 에세이: ⑧ 나치에 대항하여 유대인들을 보호한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10여년 전, 내가 아시시를 찾아가게 된 계기는 바로 이 기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잘 알려진 이 기도문을 작성한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가 자비와 평화의 도구로써 빛을 발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때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나치 독일과 독일군 점령지 유럽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학살한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6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피비린내 나는 전시 상황 중에 아시시의 성직자들과 시민들은 히틀러의 광기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목숨을 걸고 양심의 소리를 따라 은밀하고도 대범하게 집단행동에 들어간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 전쟁 당시 이탈리아에게 가장 급박했던 시기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정부가 전복된 1943년 7월 이후였다. 9월 8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이 이탈리아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 북부를 장악했고 아시시도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도시 중에 하나가 되었다. 같은 달에 영국군과 미군이 북쪽으로 싸우기 위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해 이후 10개월 동안 양측은 이탈리아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는데, 이때 밀라노와 파도바 같은 곳에 도망친 사람들이 아시시로 흘러 들어왔고 독일을 탈출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 피해있던 유대인들도 이 시기에 아시시로 넘어왔다. 


이때 아시시의 주교였던 몬시뇰 주세페 플라시도 니콜리니(Monsignor Giuseppe Placido Nicolini)와 돈 알도 브루나치(Don Aldo Brunacci)라는 젊은 사제가 중심이 되어 피난온 유대인들을 조직적으로 돕기 위해 아시시 네트워크(Assisi Network)라는 지하조직을 설립한다. 니콜리니 주교는 바티칸으로부터 신임을 받는 성직자였을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종교적 동맹 네트워크를 소집할 수 있는 전략가이자 조직가였다. 아시시 네트워크에는 이 외에도 산 다미아노의 루피노 니카치(Rufino Niccacci) 신부, 지역 인쇄업자인 루기니 브리지(Luigi Brizi)와 그의 아들 토렌트(Trento) 등이 주요 멤버로 활약했는데, 니콜리니 주교는 알도 브루나치 신부를 통해 아시시 마을 내의 26개 수도원과 수녀원을 피난처로 사용할 것을 지시하고, 유대인들에게 위조 통행증 서류를 만드는 일, 음식과 의복과 같은 필요한 물품들의 지원을 돕도록 시민들을 조직하게 했다. 홀로코스트 역사가 마틴 길버트(Martin Gilbert)에 따르면 이러한 조직적인 레지스탕스 아시시 네트워크의 활동으로 인해 아시시에 피난을 와있던 약 300여 명의 유대인이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Kindness is the golden chain by which society is bound together.  ―Johann Wolfgang von Goethe


1943년 가을 아시시로 피난을 와서 다른 수백 명의 유대인 피난민들과 함께 숨어 살았던 파도바대학(University of Padua) 에밀리오 비테르비(Emilio Viterbi) 교수는 당시를 회고하며 “아시시에 피난처를 찾은 우리는 우리를 구하기 위한 아시시의 노력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600만 유럽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서 아시시에 있던 우리 중 단 한 명도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증언했다. 특히 전쟁의 막바지 시기에는 아시시에 피신해 온 유대인 난민들의 수가 많아져 이들을 수용할 피난처가 상당히 부족했는데 이때 니콜리니 주교는 “내 침실과 사무실 외에는 이제 방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무실에서 잠을 잘 수 있으니 내 침실은 오늘부터 당신들의 것입니다.”라고 그의 거처마처 낯선 피난민들에게 내어준 그런 성직자였다고 비테르비 교수는 회상했다. 


1943년 10월 23일 하루동안 독일군이 로마에서 체포한 유대인은 총 1,035명으로 이들은 모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으며 그곳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살해된 사람만 800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시시에 숨어있던 유대인들은 단 한 명도 독일군에 의해 발각되지 않았다는 점은 실로 아시시의 성직자들과 시민들 모두가 함께 자신들의 생명을 걸고 숨죽이며 만들어낸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제2차 대전 당시 아시시의 나치에 대한 저항활동은 1985년 ‘아시시 언더그라운드 (The Assisi Underground)’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상영시간 1h 55m)


이전 07화 문제냐 신비냐, 관점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