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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리 Mar 22. 2024

우당탕탕 나이아가라 정착기

나이아가라 폭포가 나를 부른다.


에드먼턴에서 나이아가라로 


남편은 나와 결혼 전, 캐나다 온타리오주 나이아가라 지역에서 유학 중이었다. 결혼 뒤 우리는 함께 P.E.I, 에드먼턴을 거쳐 다시 나이아가라에 돌아왔다. 남편의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는 남편과 가족처럼 지내던 캐나디안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의 성함은 윌리엄 모닝스타(빌)였다.


남편과 빌 할아버지는 15년 전 캐나디안 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가족이 없이 홀로 지내던 빌 할아버지와, 늘 어른들에게 잘하던 남편은 금방 친구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유학 중인 남편과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식사도 잘 챙겨주시고 캐나다 유학생활에서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도와주셨다고 한다. 남편은 그런 할아버지의 말벗이 되어드리고, 또 할아버지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도와드리며 가족처럼 끈끈한 친구가 되었다.


참, 나이가가라에 온 뒤, 우리는 에드먼턴 집주인과의 소송으로 인해 두 번 정도 다시 에드먼턴에 비행기로 왔다 갔다 했는데, 피고였던 집주인은 법원에 출석도 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승리했다. 이때에도 감사한 한국인 통역사님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인연은 이어졌으며, 캐나디안 판사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며 피고를 대신해 나에게 직접 사과까지 했다.  


에드먼턴에서 나이아가라에 도착했을 때, 빌 할아버지께서 버펄로(Buffalo) 공항에 우리를 마중 나와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나이아가라에서 집을 구하고 생활이 안정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의 집에서 머물며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낯선 타국 땅에서 지낼 이라는 공간을 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몸소 겪었던 우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대해 주시는 할아버지에게서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느꼈다. 그렇다, 캐나다에서 거처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단 풀타임 직업이 있어야 하고, 재직과 재정이 증명되어야 하며, 보증인도 세워야 하는 등,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그래서 첫날 할아버지의 집에서 잠을 자는데,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는 전직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교직에서 은퇴하신 지 오래된 상태였고, 앤틱시계 수집가셨다. 매주 옥션에 가서 앤틱 물건들을 보는 것은 빌 할아버지의 낙이었다. 미적 감각도 뛰어나셔서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기자기하게 집을 꾸며 놓으시고, 항상 본인의 생활 루틴이 있으신 깔끔한 성격을 지닌 분이었다. 온화하고 마음이 따뜻하며 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분이시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웃음은 마치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의 산타클로스의 얼굴처럼 해맑았다. 오래전 돌아가신 빌 할아버지의 아버지께서는 나이아가라지역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지내신 엘리스 모닝스타라는 분으로, 나이아가라 컬리지에 가면 엘리스 모닝스타가 학교 설립에 기여한 내용에 대해 찾을 수 있다.


Ellis P. Morningstar



빌 모닝스타 할아버지의 가족은 대대로 수력을 이용해 밀가루를 생산하는 제분소를 운영한 가문으로 지금도 나이가라 지역에서 모닝스타 밀(Morningstar Mill)이라는 곳에 가면 이 가족들의 자취와 전통적인 방법으로 제분하는 것을 견학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http://morningstarmill.ca/    

                                                                                                                                                                                                                      

모닝스타 밀 <Morning star Mill>  2714 Decew Road, St. Catharines Ontario, Canada L2R 6R2




지역이동을 했으니, 나에게는 또 숙제가 주어졌다. 남편은 당시 학생 신분이어서 학교로 돌아가야 했고, 나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즐길 새도 없이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 또다시 고군분투했다. 구직을 서두른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살아야 할 거처를 구하기 위한 풀타임 재직증명을 위해서였다.


에드먼턴에서 나의 첫 셰프 제임스와 후임 셰프가 써준 추천서를 들고 에드먼턴에서 했던 것처럼 나이아가라 이곳저곳에 기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도 캐나다에 처음 와서 맨땅에 헤딩하던 때보다 1년 반이라는 키친경력이 생겨서 전보다 조금은 수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에드먼턴에서의 경험이 마중물이 되어준 느낌이었다.




내가 둥지를 틀 키친은 어디인가? 


이곳에서도 여러 곳에 나의 이력서를 돌렸고, 연락이 오는 곳마다 면접을 보러 갔다.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25분 정도 떨어진 동네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용이한 출퇴근을 위해 나이아가라 폭포 쪽이 아닌 집에서 가까운 곳 위주로 구직을 했다. 먼저 연락이 오는 곳에서 바로 일을 시작했고, 또 다른 곳에서 연락이 오면 면접을 보면서 점점 더 나은 직장으로 옮겨나갔다.


나이아가라에서 처음 일했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의 셰프가 정말 독특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질라니. 그는 일을 하면서 땀을 한 바가지씩 흘렸는데, 그가 만드는 토마토소스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올리브오일을 도대체 얼마나 많이 넣는지, 요리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봐도 저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지금도 그 충격적인 잔상이 잊히지가 않는다. 이곳에서는 그리 오래 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나와 다른 직원들에게 페이를 지급하지 않고 도망을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신고했고, 어렵게 연락이 닿은 오너를 통해 페이를 지급받고 그 레스토랑은 얼마 안 가 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나는 다른 잡을 구해야 했다. 또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집과는 조금 멀었지만,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고급레스토랑이라 그곳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선배가 너무나도 무례했다. 하루하루 출근하는 게 괴로울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다. 나는 내가 일을 더 잘하게 되면 나아지겠지... 스스로 위안을 하면서 하루하루 버텼지만, 그 사람과의 관계는 전혀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 선배는 주로 새벽에 출근해 혼자서 재고관리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는데, 그녀가 그동안 식재료들을 몰래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 것이다. 결국 그녀는 해고가 되었고, 나도 그 직장을 조금 더 다니다가 다른 곳에서 연락이 와서 한번 더 이직을 했다.


다음에 일한 곳은 케이터링을 하는 회사였는데, 오너가 요리학과 교수이자 셰프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직원들과 잠깐이었지만 정이 참 많이 들었는데, 이곳에서도 일을 하다가 다른 곳에서 또 연락이 와서 이직을 하려고 하자, 이 오너셰프는 화가나서 나를 협박했다. 네가 어디를 가던지 너에 대해 나쁘게 말하겠다나 뭐라나... 하지만 나는 나의 소신을 따라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을 결심했다.  


내가 초반에 정착을 하는 기간 동안 이직을 많이 해서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둥지를 틀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은 나에게 너무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물론 내가 이직했던 모든 직장에서 그만둘 때 2주 전에 노티스를 하고 다른 사람을 구할 시간까지 충분히 일 해준 뒤, 잘 마무리하고 그만뒀다. 이 외에 면접을 봤던 곳만 세어보아도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나는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는데, 한 카페에서 파티셰로 면접을 봤을 때 일이었다. 나는 그동안 만든 디저트 사진을 인화해서 포트폴리오처럼 가지고 다니며 면접을 보았는데, 그곳의 오너였던 할머니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같이 재능 있는 아이는 이곳이 아니라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곳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요리에 재능이 있다고? 요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지만,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보았다.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참 힘든 상태였고, 나는 잊고 있었지만, 남편의 기억으로는 내가 그 시절 집에 와서 울기도 했었단다. 그렇게 힘들 때 그 할머니의 말은 나에게 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나를 부른다.


그 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on-the-Lake)의 한 와이너리에서 연락을 받았다. 정말 내가 가는 레스토랑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었다. 이 레스토랑은 젊은 요리사들이 많아서 활기찼고, 무엇보다 나를 너무 좋아해 주었다. 이제야 좀 일할만한 분위기를 느꼈다. 특히 나의 플레이팅과 내가 만드는 디저트를 좋아해 주어서 더 힘을 내며 일하던 중이었다. 와우! 나아이가라 폭포에 있는 호텔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내가 일을 그만두려 하자 와이너리의 오너는 나를 붙잡았고, 페이를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아이가라 폭포에 가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만난 카페사장 할머니의 말이 떠오르며 더 넓은 곳에서 요리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미안함을 뒤로한 채 작별인사를 한 뒤, 나는 또 한 번의 이직을 준비했다.


처음 나이아가라 지역에 와서 며칠 관광객 마냥 지역을 돌아볼 때, 인상 깊게 보았던 레스토랑이 몇 군데 있었다. 한 곳은 카지노 안에 있는 이탈리안 파인 다이닝이었고, 또 다른 곳은 월드와이드 체인 호텔이었다. 많은 곳에 이력서를 돌렸으나 내가 정작 가고 싶었던 호텔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아서 무작정 그 호텔에 들어가 셰프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다린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고 무례했을 수도 있지만, 그만큼 나는 간절했었다. 그런데 내가 눈여겨보던 나이아가라폭포 최고의 뷰를 가진 또 다른 호텔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내 요리 인생에 두 번째 셰프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러 갔다. 역시 그동안 내가 맴돌았던 키친들과 분위기도 다르고 무언가 더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처음 만난 호텔의 총괄셰프는 풍채가 크고 온화한 미소를 지닌 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인사과의 매니저가 함께 면접관으로 들어왔다.


여태까지의 면접들과 다르게 조금 더 체계적인 면접 과정이었다. 어려운 질문들도 받았지만, 최선을 다해서 답변했다. 그 당시 나의 영어는 많이 부족했지만, 셰프는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런데 함께 들어온 인사과 매니저의 표정이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나는 조금 긴장했다.


어느덧 면접시간의 반이 흘러갔고, 두 면접관은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이 보였다. 인사과 매니저의 표정을 보고, '아, 내 영어 때문에 망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셰프가 나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인사과 매니저를 밖으로 불러서 무언가 상의를 하는 듯이 보였다. 나는 이 호텔에서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긴장은 배가 되었고, 잠시 후 들어온 셰프가 나에게 혹시 내일 다시 와서 워킹인터뷰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워킹인터뷰란, 내가 일하는 모습을 보고 합격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의 영어실력은 조금 부족했지만, 나의 애티튜드를 보고 나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셰프가 인사과 매니저를 설득했던 것이다. 물론이죠! 를 외치며 집으로 돌아와 그다음 날 2차 면접을 준비했다. 인도에서 온 이민자였던 셰프가 같은 이민자인 나의 마음을 읽었던 것일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믈렛 어떻게 만드는 거죠? 

 

그다음 날, 나는 셰프 나이프와 조리복을 챙겨서 호텔키친에 다시 찾아갔다. 셰프는 나에게 냉장고에 가서 있는 재료를 마음껏 사용해 오믈렛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한국에서 요리경력도 전무하고 오믈렛을 만들어 본 적도 없어서 당황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기억을 더듬으며 오믈렛에 어떤 재료가 들어갈지를 상상했다. 냉장고에 있던 버섯, 양파, 토마토등의 재료들을 집어오고 달걀 몇 개를 골라 요리를 시작했다. 어떻게 가든 다행히도 배는 산으로 가지 않았고, 제법 그럴싸한 모양의 오믈렛이 다행히 "완성되어" 주었다. 옆에는 약간의 샐러드로 장식까지 해주었다.


셰프는 그동안 본인이 봐온 클래식한 오믈렛과는 거리가 먼 오믈렛 비주얼에 조금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다행히 맛은 있었고, 나는 그렇게 합격의 앞치마를 손에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아, 정말 진땀 뺀 하루였다. 너무너무 기 빨리고 힘이 들었지만, 면접을 마치고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꺄 ~ 여보 ~ 나 합격했어~!! 를 외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짜릿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10년이 훨씬 지난 그때의 일들,

정말 우당탕탕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뚝딱거렸던 나의 이 나이아가라 정착기...

과연 나는 이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 거야. 카르멘 파이팅!!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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