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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리 Mar 08. 2024

접시닦이에서 셰프로 가는 길

내가 만난 모든 셰프들은 한결같이 접시닦이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캐나다에서의 첫 직장, 운명처럼 발을 들인 주방

 

앞서 말했듯 12년 전 캐나다에 처음 왔을 때, 나의 영어실력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도전하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영문이력서를 만들어 정말 어디가 되었든 100군데 정도 이메일을 보냈던 것 같다. P.E.I 에서 에드먼턴으로 오면서 집주인을 잘못 만나 불안정한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아니 돌아보면 치열하게 구직활동을 했었다. 돈을 벌 목적도 있었지만, 한국과 캐나다 사이에서 경력의 공백 없이 소위 '경단녀'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남편은 나를 삶의 현장으로 등 떠밀었다. 처음에는 조금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로 인해 내가 더 빨리 이 사회에 적응했고, 무엇보다 현장에서 생활영어들이 정말 빨리 늘었다. 대부분 해외에 이민 오면,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공부를 먼저 하고 취업을 하는데, 나는 현장에서 말 그대로 생존영어를 배우고, 되던 안되던 일을 시작했던 케이스다.


난 한국에서의 커리어는 있지만 캐나다에서의 일 경력은 전무했다. 나란들 왜 캐나다에 오자마자 짠! 하고 내가 하던 일들을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내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갔을 때, 그때 당당하게 내가 정말 원하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잘하고 좋아하는 일에는 언어장벽으로 인해 소통에 답답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이유도 있었다.   

 

내가 이력서를 보낸 어느 곳에서든 연락이 오면, 일단 인터뷰(면접)를 하러 갔다. 엉망진창으로 영어를 하고 나도 솔직히 내가 영어로 뭔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었어도 그 경험들이 돈주고도 한다는 영어면접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드먼턴 다운타운을 지나다니면서 유심히 보았던 한 호텔에서 연락이 왔다. 어떤 일이던 상관없으니 저런 건물에서 일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며 바라보던 곳이었다.


호텔에서는 혹시 디시워셔(접시닦이)도 괜찮으면 지금 바로 와줄 수 있냐고 물었다. 출근해야 할 누군가가 Call in sick을 한 것이다. 캐나다는 이 Call in sick이 흔하다. 평소에 다니는 직장에 연락해서 ‘오늘 아파서 못 간다는 전화통화, 문자메시지 또는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한마디로 병가이다. 일하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전화로 아프다고 하면 출근을 안 해도 고용주 입장에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아프다는데 어쩌리… 캐나다 법이 그렇다. 한국에서는 아파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고, 아파도 일단 출근해서 회사에 눈도장을 찍어야 했던 나로서는 다소 문화충격이었다. 이런 습관 때문인지 그 뒤로 10년 이상을 캐나다에서 직장생활을 해왔지만, 나는 정말 다른 이에게 전염되는 질병이 아닌 이상 이 Call in sick을 써먹은 적이 거의 없다. 어쨌든 나는 출근해 달라는 연락에 “of course!”라고 대답하고 바로 호텔로 달려갔다.



그리고 키친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몇천 장은 되어 보이는 연회접시들이었다. 코스별로 애피타이저부터 메인그릇까지, 거기에 스푼, 포크, 나이프 온갖 식기와 종류별 유리잔과 큰 냄비들과 조리도구들까지… 와우… (아, 이럴 줄 알고 안 나왔구나, 이해가 바로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비록 한국에 있을 때 주방 아르바이트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교회에서 식사봉사하시는 분들을 도와서 설거지를 도와드렸던 경험을 살려서 착착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고, 다행히 디시워셔 기계에 넣은 뒤 정리하면 되는 것이어서 몇 번 해보니 요령이 생겨 나의 몸은 금세 탄력을 받았다.


첫날 나의 적응력과 스피드에(?) 감동을 받은 총괄셰프는 칭찬을 연발하며 내일도 꼭 나와달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첫 주방일이 시작되었다.


정말 말 그대로 육체노동을 하는 고된 일이었다. 디시워싱뿐만 아니라 때로는 새벽에 출근해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오버타임 근무를 한 적도 있었고 (캐나다에서 근무시간 8시간 외 오버타임을 하면 1.5배의 페이를 받는데, 그건 정말 좋았다. 그런데 또 그만큼 세금을 내야 하긴 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밤늦게까지 바닥청소와 모든 정리를 하고 산더미 같은 쓰레기들을 혼자서 다 버려야 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서 날카로운 것들에 다치는 일들도 종종 있었다.



한날은 어떤 수셰프(부주방장) 한 명의 부주의로 자신이 사용한 날카로운 식칼을 포크와 스푼이 있는 세제거품 가득한 설거지통에 안 보이게 섞어두어 디시워싱을 하던 내가 칼날을 손으로 그대로 잡아서 손을 다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캐나다 문화도 잘 몰랐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도 잘 몰라서 그냥 넘어갔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은 사유서를 쓰고 해고될 수도 있었던 큰일이었다. 그때 마침 총괄셰프도 없었고, 책임자로 있었던 부주방장이나 된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했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고 그 일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훗날 내가 키친에서 매니저 포지션이 되면서 가장 철저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전이 되었다. 사소하게는 직원들이 버리는 깡통 뚜껑의 날카로운 부분처리, 사용한 식칼은 꼭 본인이 씻을 것, 부득이한 상황에는 칼날을 위험하지 않은 방향으로 두고 다른 직원과 반드시 소통할 것, 뜨거운 것을 만질 때, 칼을 옮길 때, 뒤를 지나갈 때 알리기 등, 주방에서 안전과 관련된 것은 반복하고 강조하는 습관이 생겼다. 모든 행동이 함께 일하는 동료를 위한 배려이다. 나는 매일 퇴근하면 항상 녹초가 되었고, 그다음 날 출근시간은 또 왜 이리 빨리 다가왔었는지… 하지만 일을 할 수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내가 셰프가 된다고?


나의 첫 캐나다 직장이자 나의 첫 키친이었던 이 호텔에는 참 재미있는 캐릭터들이 많았다.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 그래서 총괄 셰프부터 수셰프, 모든 요리사들, 서버들까지 전부다 이민자였다. 특히 Front of house(F.O.H)는 매니저가 필리피노라서 여기가 필리핀인가 싶을 정도로 모든 서버들이 필리피노로 점령되어 있었다.


나의 총괄셰프 제임스는 소말리아에서 온 이민자였다. 나에게 항상 Sister라고 부르면서 따라 하기도 힘든 유쾌한 추임새로 말끝마다 “우후, 우후!하면서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제임스도 요리를 한지 오래되었는데 처음 요리를 할 때 접시닦이부터 시작했었다고 했다. 그의 손과 모든 행동들을 보면 얼마나 고되고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보였다. 제임스는 나에게 항상 "Knowledge is power"라고 말하며, 꾸준히 요리를 연습하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나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분이었다.


한편 수셰프 중 한 명이었던 로렌조는 제임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볼 땐 제임스는 열심히 하는 직원에게는 칭찬과 격려와 함께 최대한 이끌어주는 사람이었고, 그렇지 않은 직원에게는 냉정한 편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둘은 내가 볼 때도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다. 늘 서로를 해고(Fired)시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제임스의 파트너 또한 필리피노였는데 그 키친에서 페이스트리 셰프(Pastry Chef)를 담당하고 있었다. 호텔 특성상 몇백 명의 손님이 오는 연회가 참 많았다. 그래서 본음식도 많이 준비해야 했지만, 디저트는 모든 식사의 화룡정점이었다. 그만큼 손도 많이 가기 때문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나는 처음 그 키친에 헬퍼로 들어갔기에, 연회에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디저트 업무를 도와주기 시작하면서 그 일들이 점점 나에게 맡겨져 갔다. 뭐든 시작하면 빨리 배우는 편이기 때문에 점차 돕는 수준을 넘어서 나의 업무가 되어갔고, 뭐든 손으로 만드는 것은 잘하는 편이라 만드는 일을 시작하면서 키친 헬퍼 포지션에서도 점점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역시 이민자였기 때문에 캐나다 영주권을 획득하면 여러 가지로 나라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이나 삶의 질이 나아지므로 언젠가 영주권을 딸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 첫 직장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Cook(정식 요리사)”이라는 잡 포지션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훗날 캐나다 영주권 신청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뭐든 맡으면 작은 일이던 큰일이던 대충 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런 나의 성실함을 좋게 본 총괄셰프 제임스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카르멘, 너는 앞으로 정말 훌륭한 셰프가 될 거야. 인내해, Patient, Sister! 우후우후” 나는 생각했다. ‘에잉? 내가 셰프가 된다고? 흠…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리고 나는 요리전공자도 아닌데 어떻게 셰프가 될 수 있겠어?’ 하며 멋쩍게 웃기만 했다.


어려서부터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서 중학생 때부터 전단지 아르바이트, 고등학생 때는 아이스크림 가게, 선물포장, 모델아르바이트, 패밀리 레스토랑 서빙, 또 대학졸업 후에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했던 내게는 뜬금없기도 하고 나 스스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직업, 셰프가 된다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내가 믿고 의지하던 총괄셰프 제임스와 그의 파트너 페이스트리 셰프가 반대세력(?)들의 끈질긴 노략에 의해 주방을 떠나게 되었다.


제임스는 주방을 떠나면서까지 끝까지 나를 챙겨주었다. "카르멘, Sister, 네가 어디를 가던지, 언제든지 나의 추천서가 필요하면 연락해. 아니다, 당장 써줄게" 하면서 앞으로 내가 갈 곳에서 필요할 추천서까지 정성껏 미리 써주고 셰프 제임스는 그 주방을 떠났다. 제임스는 눈이 많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나를 기다렸다가 집에도 자주 데려다주었던 아직도 너무 고맙고 기억에 남는 참 인간적이었던 나의 첫 셰프였다.


캐나다는 취업을 할 때 전 직장의 추천서가 중요하다. 꼭 추천서를 서면으로 써주지 않아도 새로 들어갈 직장의 인사과(Human resource / H.R)에서 전 직장의 오너나 슈퍼바이저와 전화통화를 통해 일종의 추천(또는 비추천이 될지도)과 같은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전 직장에서 일을 잘했다면 상관없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가 되었다던지 불성실하게 일을 했다면 이 과정에서 입사의 당락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캐나다는 한국과 다르게 회사에 입사지원을 할 때 주민등록번호부터 생년월일, 성별 등의 세세한 인적사항까지 적거나 사진까지 붙이지는 않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불특정 다수의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는 나라여서 이 사람이 전 직장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지, 근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는지 등에 대해 확인을 하는 일종의 문화인 것이다. 나의 이 직장경력은 그 후로 다른 지역에서 또 다른 구직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총괄셰프와 페이스트리 셰프가 떠난 주방에 어느새 내가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 뒤로 다른 직원들이 계속 들어왔고, 나는 얼떨결에 호텔주방에서 신입직원들에게 일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여유로운 날에는 출근 전 다운타운에 있는 ESL클래스에서 틈틈이 영어공부도 했다.



나의 첫 출근날, 그때 최대한 빨리 도망을 갔었어야 했는데, 뭐든 시작하면 끝을 보는 나를 처음 주방으로 이끌고 지금까지 달려오게 한 애증의 에드먼턴, 캐나다에서의 삶의 시작과 동시에 나를 여태까지의 삶과 전혀 다른 삶으로 살게 한 그곳,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점점 욕심이 생기고 꿈을 꾸게 만든 그곳.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가끔 그곳이 그립기도 하다.


앞으로 나에게는 또 어떤 파란만장한 일들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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