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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리 Mar 01. 2024

빨간 머리 앤의 도시에서 오일샌드의 중심지로

캐나다에서의 지역이동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to 에드먼턴




결혼 전 남편은 캐나다에서 혼자 유학을 하며 캐나다 이곳저곳에서 지냈었다. 밴쿠버와 프린스에드워드 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 주의 샬럿타운(Charlottetown), 나이아가라 폭포로 유명한 온타리오주의 나이아가라 지역등... 


우리가 결혼을 해서 처음 함께 가게 된 곳은 캐나다 동부 끝에 위치한 작은 섬,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이하 P.E.I)였다.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Prince Edward Island



남편이 홈스테이를 하던 프렌치 캐내디언 가족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해서 그곳에 처음 가게 되었다. 헬렌 아주머니와 제랄드 아저씨는 남편에게 듣던 대로 참 좋은 분들이셨다.

제랄드 아저씨와 헬렌 아주머니



그곳은 우리가 잘 아는 <빨강 머리 앤>의 배경이 된 섬으로,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일할 곳을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캐나다에 처음 올 당시, 해외워킹홀리데이의 나이제한은 30세였다. 그래서 우리는 캐나다 거주를 위해서 제한나이가 되기 전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서 간 상태였기 때문에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샬럿타운의 기념품 상점
빨강 머리 앤 뮤지컬 Anne of Green Gables The Musical
샬롯타운,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Charlottetown, Prince Edward Island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는 관광지로, 여름에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시장 경제 상황이 좋지만, 매년 겨울이 다가올수록 현지인들조차도 일할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P.E.I 생활 두 달여 만에 다른 도시로의 지역이동을 결심했다.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앨버타 주의 에드먼턴(Edmonton, Alberta)이었다. 앨버타주는 록키산맥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고, 에드먼턴은 앨버타주 남부에 위치한 주도이다. 에드먼턴은 캐나다 오일샌드 생산의 중심지이자 천연자원 산업이 유명하다. 캐나다는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이기에 같은 캐나다 땅에서도 동부와 서부의 시간차도 있고, 이 주에서 다른 주로 이동하려면 비행기를 타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은 일이다. (주 이동을 위해 며칠 동안 운전해서 가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다. 정말 대단한 것 같다.)



록키 마운틴, 밴프, 앨버타주 Banff Rocky Mountain, Alberta


모레인 호수, 밴프, 앨버타주 Moraine lake banff, Alberta





잘못된 만남이 가져다준 은인과의 만남


우리가 지내던 P.E.I에서 에드먼턴까지는 비행기로도 5시간이 걸리는 거리여서 우리는 지역이동 전에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사진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우리 수중에는 1000불(한화로 100만 원 정도)의 돈밖에 없었다. 에드먼턴에 있는 집주인에게 그 돈을 디파짓(계약금)으로 먼저 보낸 뒤, 이사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정든 P.E.I 식구 제럴드 아저씨와 헬렌 아주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는 에드먼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을 훨씬 넘긴 새벽이었다. 공항에서 라이드 해주시는 분을 만나 새벽 2시경 우리가 살게 될 집에 도착했다. 지친 몸으로 들어간 집은 우리 보았던 사진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P.E.I에서 화상통화와 이메일로 주고받던 내용에 집이 약간의 공사 중이라는 내용은 있었지만, 우리의 예상보다 집 상태는 심각했고, 비위생적이었으며, 제일 충격인 것은 신혼부부였던 우리에게 집주인 자신이 누워있던 거실에 (퍼블릭한 공간) 있던 침대를 쓰라고 했다. 너무 황당했지만, 새벽 2~3시에 당장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었고, 우리의 전재산이나 마찬가지였던 1000불도 그 주인의 손에 있는 상태였다. 


지역이동을 하면서 P.E.I에서 사용하던 휴대폰도 해지했던 상태라 남편은 밖에 나가서 공중전화로 캐나다 경찰서에도 전화를 해보고 한국영사관에도 연락을 해보았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돌아온 대답은 "집주인과 테넌트(세입자)의 계약 또는 금전 문제로는 경찰이 출동하지 않는다"였고, 한국영사관 또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상처받을 정도로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편이 나가서 여기저기 알아보는 사이, 나는 집주인과 같은 공간에 어색하게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함께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암막커튼을 치더니 우리에게 내어주었던 침대에 다시 누워서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졸릴만한 시간이긴 했지만 이런 황당한 경우가… 


나는 당시 캐나다에 간지 세 달 정도 채 안된 상태라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한국에서 살 때도 외국인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소통을 두려워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캐나다에 처음 와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내 의사를 표현했고, 남편이 없는 사이 그 여주인이 내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나는 그 상황이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남편이 처음에 경찰에 연락했을 때, 금전적인 문제로만은 경찰이 출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알아보러 나간 사이 일어난 일이라서 이제는 폭력이 연루되었기 때문에 경찰을 부를 수 있을 거라고 판단되었다. 잠시 뒤 돌아온 남편에게 바로 말해 그제야 경찰이 출동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정서적인 문제가 있는 의사였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이었다.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우리 짐도 밖으로 다 내던져 물건도 손상이 되었다. 



그렇게 긴 새벽을 지나 아침이 밝았고, 감사하게도 공항에서 우리를 라이드 해주셨던 한국분이 떠나시며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셨었는데, 바로 그런 일이 생겨 에드먼턴에 아무 연고가 없는 우리는 염치불고 하지만 그분께 다시 연락을 드리게 되었고, 그분 가족의 도움으로 며칠간 그분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푼 꿈을 가지고 온 캐나다에서 이런 일을 당해 황망하게 짝이 없었지만, 씩씩한 우리 부부는 좌절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단 은혜를 베풀어주신 한국인 가족분들께 최대한 빨리 보답을 하기 위해서 남편은 잠깐이었지만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건설일용직에 뛰어들어 그 겨울 추운 새벽부터 공사장에 나가 철근을 옮기며 열심히 일했고, 두 달 만에 은혜에 먼저 보답을 해드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우리의 억울한 사연을 도와줄 수 있는 곳을 수소문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승소가 확실한 우리의 사연을 변호해 주겠다는 캐나다 국선변호사가 나타나서 무료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싸움은 상당히 오래갔지만, 우리는 조급해하지 않았고 기도하며 기다렸다. 그러면서 우리의 새로운 보금자리도 다시 마련하게 되었고, 나도 남편을 도와 틈틈이 구직활동을 하였다. 



낯선 땅에 이민오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경우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과연 이 캐나다 땅에서 취업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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