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랑땡
먼저 해야 할 일은 야채를 준비하는 것이다. 부추, 당근, 양파, 쪽파도 괜찮다. 이것들을 깨끗하게 씻는다. 당근은 설렁설렁 흐르는 물에 흙을 씻어내고 감자 칼로 쓱쓱 벗겨내면 된다. 양파는 더 간단하다. 뿌리와 꼭지를 잘라내고 얇은 껍질을 벗겨내 흐르는 물에 한번 헹궈주면 끝. 부추를 씻는 일은 성가시다. 뿌리 쪽에 붙은 얇은 막을 뽑아내면서 이파리 끝 쪽에 노랗게 말라가는 부분을 뜯어내야 한다. 그렇게 다듬은 부추를 흐르는 물에 씻는다. 길고 얇은 이파리에 고운 흙이라도 묻어 있으면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 게다가 다음 단계의 일을 쉽게 하려면 씻으면서 가지런히 정리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 부추 반단을 그렇게 다듬고 있으면 뒤에서 엄마의 혀차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 종일 걸리겠다. 무슨 부추 반단을 가지고 씨름을 하노.”
마스터급의 경력자인 엄마가 보기엔 내 손질 속도는 속이 터질만 했다.
다음으로는 깨끗이 씻어둔 야채를 다져야 한다. 커다란 당근 두개, 내 주먹만한 양파 세개, 부추반단. 단단한 당근은 칼질 한번이 쉽질 않다. 온 힘을 다 주어도 부들부들하는 칼이 눈에 보인다. 이쯤 되면 엄마의 손이 냉큼 당근을 뺏아간다.
“그래갖고 밥해먹고 살겠나?”
당근 한 면의 둥글둥글한 부분을 칼로 탁 쳐내더니 타다닥 탁탁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린다. 두어번 방향을 바꿔 타다닥탁탁 하고 나면 당근은 곱게 다져진 채 산이 되어 있다. 엄마가 당근을 자르는 동안 구경만 해서는 안된다. 추석 전전날 저녁은 생각보다 짧고 할 일은 그보다 많다. 양파를 든다. 판판해진 뿌리 쪽을 도마 위에 놓고 가운데를 자른다. 반으로 갈린 양파의 잘린 면을 도마위에 두고 가능하면 얇게 뿌리 쪽을 조금 남기고 탁탁 칼질한다. 90도로 돌려 착착 썰어나가면 맵지만 보기 좋게 양파가 다져진다. 성가신 부추는 남은 물기를 탈탈 털어내야한다. 사방으로 튀는 물방울에 추석특선 티비프로를 보던 동생이 소리친다.
“아~ 쫌.”
놀고 앉아있는 놈이 얄미워서 한 번 더 털어준다.
“누나, 쫌!”
커다란 스텐볼 안에 주황색, 초록색, 하얀색 산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 곧 무너질 하찮은 산이다. 삼베 면보에 꾹 눌러 짜부라진 두부 한 모가 툭하고 그 산 위로 떨어진다. 거봐라 이렇게 금방 무너질 산이라니까. 뒤이어 군데군데 하얀 지방이 보이는 다진 돼지고기가 두부 위를 누른다. 적당량의 소금과 설탕, 후추가루에 비벼진 고기였다. 밀가루 한숟가락과 달걀 두어개가 들어가면 이제 반죽을 섞어야 한다.
그 기분이 참 싫다. 비닐 장갑을 끼고 있지만 차갑고 묵직하고 진득하다. 찰지게 잘 치대지 않으면 모양잡기가 힘들어진다. 야채들의 숨도 좀 죽어야하고 두부랑 고기랑 계란, 밀가루가 엉겨 붙어야 동글동글 모양잡기가 쉽다. 싫어도 촥촥 열심히 치댄다.
저녁먹고 시작한 일인데 벌써 일일드라마가 끝나고 있다. 반죽을 치대느라 씨름하고 있는 사이, 엄마는 동생들 앞에도 일거리를 놓았다. 산적 꽂기. 햄, 맛살, 쪽파, 대친 당근, 밑간 된 돼지고기와 이쑤시개 한 통을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한 개 먼저 꽂아준다. 예시다. 햄, 쪽파, 맛살, 돼지고기, 당근 순으로 꽂아야 한다. 말랑말랑한 햄은 깊숙하게 꽂혀도 당근처럼 부러지지 않는다. 붉은색 햄 옆에는 푸르거나 하얀 쪽파가 제격이다. 들쑥날쑥 모양이 제각각이라 제일 가쪽에 자리 잡을 수는 없다. 초록색 쪽파가 꽂혔다면 맛살은 흰색 쪽으로 하얀색 쪽파가 꽂혔다면 맛살은 붉은색 쪽으로 꽂는다. 이렇게 꽂아야 계란물을 입혀 구웠을 때 색이 곱다. 흐물흐물 모양잡기 힘든 돼지고기를 꽂고 나면 단단한 당근으로 꽂이 끝을 막아준다. 살짝 데치긴 했지만 얇고 단단한 당근에 이쑤시개를 꽂는 것은 요령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댕강. 한 쪽 다리 짧은 산적이 되고 만다. 산적을 담을 플라스틱 통 하나를 앞에 가져다 놓고 동생들은 하나씩 꽂이를 완성한다.
숟가락 하나 들고 볼 한가득인 반죽을 떠낸다. 두어번 숟가락으로 모양을 잡고 동글동글 빚어서 가운데를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누른다. 이 반죽이 다 없어질 때까지 내가 해야하는 일이다. 지금부터 무념무상의 시간, 멍하니 같은 일을 반복한다. 내가 모양을 만들어 밀가루 더미 속에 놓아두면 엄마가 밀가루, 계란물, 빵가루 순으로 옷을 입힌 다음 커다란 통 속에 넣는다. 어느새 산적 꽂기를 다한 동생이 통 속의 동그랑땡들을 층층이 쌓는다. 횡과 종을 잘 맞춰 각을 잡는다. 빵가루를 입히지 않았다면 횡과 종 사이에서 다시 반죽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어떻게 만든 동그랑땡들인데 그렇게 돌아가게 둘 순 없다. 꼼꼼하게 빵가루 옷도 입혀준다.
30개쯤 만들고 앉은 자세로 기지개를 켜고 다시 30개쯤 만들고 기지개를 켠다. 그렇게 일고여덟번 기지개를 켜고 나면 스텐볼을 박박 긁어도 동그랑땡 한 개가 나오지 않게 된다. 그쯤이면 이미 아홉시 뉴스도 끝난다. 차곡차곡 쌓인 동그랑땡 통, 산적 통을 냉장고에 넣고 설거지를 끝내면 아빠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다. 손에 들린 월드콘 다섯개 들어있는 봉지가 아빠의 성의 표시이다.
내일은 할머니댁으로 간다. 사촌은 커녕 삼촌도 없는 집에 가서 묵은 청소를 하고 오후 내도록 전을 부친다, 생선을 찐다, 우리끼리 종종거리겠지. 꿉꿉한 이불에서 뻐근하게 잔 것 같지도 않은 잠을 자고 나면 새벽같이 아빠가 올 것이다. 늦잠 잔 삼촌이 느즈막히 들어와 추석 아침부터 아빠한테 한소리 듣고 음복주라며 마신 차례주에 취해 이방 저방에서 코 골고 자겠지.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작은 집에서 이틀을 내내 만들고 부친 전들을 세끼 내리 먹으며 그렇게 추석이 지나 갈 것이다. 갓 부쳐내 따끈한 동그랑땡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가 지루하고 기나긴 명절의 유일한 즐거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