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말이
누군가 좋아하는 반찬을 물어보는 순간을 나는 노리듯 기다린다. “계란말이!”라고 경쾌하게 답하기 위해서다. 우리말 자음 ‘ㄴ, ㄹ, ㅁ’의 가벼운 소리가 밝은 모음과 만나 내는 소리라 말소리 자체도 즐겁지만, 계란말이는 색깔이 더 즐겁다. 노오란 계란물 사이에 삐죽빼죽 보이는 작은 당근의 주황색과 절대 절대 단일 품목으로는 먹고 싶지 않은 파, 부추 따위의 초록이 그림책 속의 도시락보다 더 그림같아 보인다. 그 뿐일까? 노란 계란물 위를 턱 덮어 뱅글뱅글 돌려 만드는 김계란말이의 뱅뱅이는 모양도 색깔도 명랑하다. 그 명랑함 때문에 김계란말이의 성공도가 낮다는 사실이 처참할 때도 있다.
나의 급한 성격으로는 타지 않은 노오란 계란말이를 만들 수 없다. 약한 불에서 은근히 익혀야 예쁜 색을 낼 수 있는데 그 약한 불이라는 게 내 속을 먼저 태우는 지라 계란을 태우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계란말이에는 김계란말이같은 뱅뱅이가 살짝 탄 갈색으로 생겨 있다. 이건 김계란말이의 실패보다 더 처참하다.
수리영역 종료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감독관들이 교실 밖으로 물러났다. 낡은 마루바닥은 의자 한번 끌 때마다 삐걱 소리를 냈다. 교탁 주위에서 가방을 찾아 도시락을 꺼넨다. 언어영역을 보기 좋게 망해버린 뒤라 수리영역 망한 것쯤은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었다. 아는 얼굴이 많은 아이들은 옹기종기 도시락을 꺼네 이미 수다잔치를 열었다. 치킨에 제육볶음에 주먹밥이니 지들끼리 하는 이야기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우와~ 정말 속이 좋은 아이들이구나. 이런 날 치킨이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도시락을 열었다. 노란 계란말이, 초록 시금치 나물, 빠알간 김치 삼색의 반찬이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보온 밥통의 따뜻한 밥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났다. 이 시험의 끝이 내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라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반찬은 뭐 싸줄까?”
“시금치랑 계란말이.”
“그거면 돼?”
“응, 다른 건 속 부대낄 거 같아.”
엄마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제일 예쁜 계란을 고르고, 벌레 먹지 않은 시금치 잎사귀를 고른 것을 안다. 제일 예쁜 과일, 제일 싱싱한 채소, 조금이라도 모양이 틀어지지 않은 온전한 것. 그 1년동안 고르고 고른 것들만이 나의 것이었다. 엄마 마음의 주문 같은 것, 엄마의 응원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직 따뜻한 하얀 쌀밥을 보자 눈물이 났던 것이겠지. 아직 반이 넘게 남은 시험이 있으니 조금씩이라도 떠서 꼭꼭 씹는다.
우물우물 씹어서는 탈이 날 것 같았기에 더 야무지게 꼭꼭 씹는다. 시금치의 단 맛이, 김치의 시원한 맛이 가라앉은 기분을 달래 주었다. 입안에서 도는 생기에 없던 기운도 생긴다. 타지 않고 완벽하게 노란, 계란말이를 입에 넣을 때쯤엔 의욕 충전. 남은 시험은 전부 갈아 마셔버리겠다는 무모한 다짐도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
4세 아동과 함께 사는 나의 집에서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그래도 야채를 다져 넣어서 말고, 햄이나 치즈, 맛살 같은 것을 넣고 말고, 그냥도 말고, 소시지 계란 입혀 굽고 남은 계란물도 말고. 그렇게 계란을 계속 말아 댄다. 내가 계란을 마는 날은 기운이 필요할 때이다. 몸이 찌뿌둥 할 때나, 마음이 찌뿌둥할 때이다. 예쁘게 잘 말아질 때면 100퍼센트 기운 충전, 예쁘진 않아도 간이 딱 맞을 때는 90퍼센트 기운 충전이다. 하지만 역시 엄마가 해주는 계란말이가 최고다.
주말이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던 아침, 엄마가 해주는 밥이 생각난다. 이제 일어나야지 소리에 조금만 조금만 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일요일 늦은 오전. 먹고 더 자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삐죽이 열린 문틈으로 들어온다. 시큼한 묵은지에 돼지고기 숭덩숭덩 썰어 넣고 오래 오래 끓인 김치찌개 끓이는 냄새에 정신을 차린다. 눈곱도 안 때고 식탁 앞에 앉으면 계란 10개를 다 풀어 말아 아기 손바닥만하게 빗겨 자른 계란말이가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았다. 눈도 다 못 떴지만 따뜻한 계란말이부터 맨 손으로 집어 든다. 흰 밥 크게 떠서 같이 먹고 나면 다시 잠들 수 없게 된다. 일요일은 그렇게 계란말이와 시작되어야 제 맛이다. 그렇게 시작되어야 제맛인데...
4세아동의 식성은 나만큼이나 까탈스러워서 뭐 하나 쉬운게 없다. 그래도 주말 아침이면 같이 계란을 깬다. 저 하나, 나 하나 계란 두개를 깨서 소금 한꼬집, 설탕 한 스푼, 거기에다 우유 쪼르륵. 거품기와 함께 내밀면 휘휘 곧잘 젓는다. 몽글몽글 섞인 계란물에 세모로 자른 식빵을 적셔 녹인 버터가 넘실 대는 팬 위에 놓는다. 아직 위험해서 조마조마 한데 꼭 제가 해보겠단다. 엄마의 계란말이가 설탕 솔솔 뿌린 계란빵으로 바뀌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