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서 끝까지 간다 프로젝트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광야에서 40년간 방랑하던 히브리 민족은 성서에서 가나안(훗날 팔레스타인)이라 불리던 땅에 정착한다. 가나안은 풍성한 곡식 생산뿐 아니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역로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귀한 땅이었다. 그만큼 제국들의 쟁탈전도 치열한 곳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떠돌던 반유목민 시절, 야훼의 강력한 힘을 마주하면서 야훼를 전능한 신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이 지역의 토속신을 받아들이면서 두 개의 종교 사상을 나란히 붙잡으려 했다. 이를 성경에서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주님을 저버리고 주위의 백성들이 섬기는 다른 신들을 따르며 경배하여 주님을 진노하게 하였다... 그들은 자기 조상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걸어온 길에서 빠르게 떠나갔다. 그들은 조상처럼 살지 않았다(사사기 2:17).”
사사기의 이야기 구조는 도식적이다. 일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고 율법이 요구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진다. 야훼는 분노한다. 그리하여 이방인들의 손을 빌어 그들을 징계한다. 가혹한 시련의 시간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음엔 그러지마”하며 그들을 구원한다. 짧은 평화가 찾아오지만 오래가지 않는다. 또 다시 죄의 시간, 유혹의 시간.
사사기는 죄, 심판, 부르짖음, 구원자의 도래, 평화, 그리고 다시 또 죄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다소 도식적이고 상투적이긴 해도 그리하여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은 고마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세월의 흐름 위에 잊게 되고, 그로부터 또다시 욕망의 바람이 불어온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거야’
아무리 다짐해도 별 소용이 없다. 기억에는 유통기한이 있는 법이고 인간은 쉽게 잊어버리는 이기적인 동물이다. 더불어 “과연 이게 큰 잘못이야?” 이런 의문도 들었을 거다. 척박한 광야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사람들. 이들에게 풍요로운 가나안 정주민의 삶, 종교, 풍경은 매력적으로도 다가왔을 거다. 그들과 섞여 함께 살게 되면서, 결혼도 하게 되고, 그들의 풍습과 종교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도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잃게 된 광야의 정신 아닐까? 약자들에 대한 연대, 이웃에 대한 사랑, 순종하는 삶의 가치는 뒤로 밀리고 거리는 욕망으로 들끓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머물면 고이는 걸까? 광야에서의 삶을 마무리 짓고 어느 공간에 머물게 되면서 인간은 점점 더 타락하고, 점점 더 악에 이끌리게 된 듯싶다. 탐욕을 매개로 악의 꽃이 창궐하고, 탐욕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면서 선한 것, 위대한 것, 고귀한 것은 잊혀진다.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이용하려 드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공간에는 악취가 진동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신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된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 빠져 있었고, 신은 이들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리사다임의 손에 넘기긴다. 구산리사다임, ‘두 배로 악한 구산 사람’이라는 뜻이라는데, 성경에서 그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스라엘은 8년 동안 억압과 폭력에 억눌렸고, 그때서야 다시 신을 찾는다. 이 부르짖음에 선두에 선 리더가 옷니엘을 시작으로 한 열두 명의 사사들이었고, 사사기는 이들의 이야기가 기록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왜 사사기가 성경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을까? 생각해보면 이들의 삶이 자신의 영성만을 돌보는 삶, 자족적 삶을 넘어섰기 때문일 테다. 하나님의 영은 이들을 공적인 삶의 현장으로 소환했고,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일의 루터교 목사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1842-1919)는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진리의 싸움 속으로 자진해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토로하며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미 이 세상엔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충분히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자기주장을 논하는 사람도 있을 만큼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사람은 너무 부족합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떠는 자들, 진리의 말씀에 부서지고 충격 받은 사람들, 그럼에도 기쁘게 ‘예’라고 대답하며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2018, pp.103~105)
사사기는 옷니엘이 죽을 때까지 사십 년 동안 전쟁이 없이 평온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목은 다시 혼돈의 반복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다”(삿3:12)
이게 어쩔 수 없는 인류의 발걸음일 거다. 갈지자의 행보. 하지만 삶의 재미있는 스토리는 그런 결론을 알면서도 뚜벅뚜벅 분투하는 삶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만족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평온함에 머물지 않는 삶,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좌충우돌 노력하는 삶, 사회적 소외와 아픔의 옆에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삶,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모든 게 다시 허물어질줄 알면서도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애쓰는 삶.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삶을 꿈꾸는가? 홀로 잘 사는 삶을 넘어서길 바란다.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 데 너의 작은 손길이 필요하다는 신의 초대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발로 행동하는 내가 되길 바란다. 점점 더 그러기가 어려워진다고 이야기하면 핑계일까? 우리가 사는 세계는 광야도 아니고, 풍요로운 땅도 아니고, 손가락만 까딱까딱 거리는 디지털의 세계, 가상현실의 세계이니... 그리하여 좀 더 많은 사사를 내 가슴 속에 부둥켜 안고 살아야 하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다 할지라도, 또다시 신이 보기에 악한 일을 저지르고 저지를 테지만...
참고문헌
크리스토프 불룸하루트(2018). [행동하며 기다리는 하나님나라], 전나무 옮김, 대장간.